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서상륜-서경조 형제, 소래마을서 전도
1884년, 주민들 초가집 예배당 마련
공식 선교사 입국 전 세운 ‘솔내교회'

서상륜, 베아드 선교사, 고윤하 ⓒ천지일보 2018.8.23
서상륜, 베아드 선교사, 고윤하 ⓒ천지일보 2018.8.23

한글성경은 한국의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개화와 문맹퇴치에 큰 기여를 하였다. 최초의 성경 번역은 포르투갈 또는 프랑스 신부가 중국에서 4복음서의 구절을 발췌하여 해석을 붙인 모습으로 나왔다. 성경 자체를 온전하게 번역하여 펴낸 최초의 것은 1882년에 만주에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주관하는 가운데 서상륜, 백홍준 등이 번역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이며, 3년 뒤인 1885년 일본에서 개종한 이수정을 중심으로 번역된 ‘마가의 전복음셔언해’가 이어 나왔다.

최초의 성경번역에 참여한 서상륜(徐相崙)과 그의 동생 서상우(相佑, 호 景祚) 형제는 한국 개신교의 개척자들이다. 서상륜은 달성 서씨(徐氏) 석순(奭淳)의 장남으로 1849년 7월 19일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조선의 24대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이 즉위하였으며, 아편전쟁(1840~1842)의 충격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붕괴되고 서구 문명의 물결이 밀려들던 때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전히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서구 문물에 접촉하는 데 대해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 10년 전인 1839년(헌종 5)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주교·피에르 모방 신부·자크 샤스탕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되었고(기해박해), 그 3년 전에는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 한강 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병오박해). 그러므로 특히 서양 종교에 접하는 일은 금기이자 목숨을 건 일이 되어 있었다.

서상륜의 집안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서 형제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자라났으나, 상륜의 나이 열네 살 때 콜레라가 유행하여 갑자기 아버지를 잃었고, 닷새 후에 어머니마저 여의어 형제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그럼에도 장남 상륜은 할머니 보호 아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고, 동생은 독학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동생 서경조의 손자 서재현은 “큰 할아버지(상륜)는 한학에 능통하였을 뿐 아니라 글씨도 명필이어서 우리도 그분에게 글씨 공부를 많이 하였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닦은 한학 실력이 나중에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크게 쓰이게 되었다.

서상륜의 한학 실력이 나중에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크게 쓰이게 되었다. ⓒ천지일보 2018.8.23
서상륜의 한학 실력이 나중에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크게 쓰이게 되었다. ⓒ천지일보 2018.8.23

서상륜의 나이 스물이 넘으면서 점차 집안이 기울었다. 그는 만주로 드나들면서 홍삼장사를 하였다. 1878년 29세 때 동생 상우(경조)를 데리고 랴오둥 반도의 다렌 반대편에 있는 영구(營口)로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친구들이 영국인 선교사 집으로 인도하여 아일랜드 출신의 의료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때 너무나 고통스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한 서상륜을 매일 두세 차례씩 와서 극진히 돌보아 주는 메킨타이어(John Maclntyre) 목사의 정성과 그의 끈질길 개종 권유에 감동되어 병이 나은 후 1879년 존 로스(John Ross)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서상륜(1848~1925)은 이때의 개종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이십 칠년 전에 대청국 봉천성 우장당방 영구라 하는 항구의 여간 사소한 장사를 갔다가 뜻밖에 신병을 나서 거의 죽을 지경에 당하였나이다. 그때에 감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있어 전도하시는 대영국 목사 마근태(매킨타이어)씨에게 감동하사 나를 객점에서 자기 집으로 옮기고 영국의사를 청하여 매일 이삼차씩 진병하며 복약하매 거의 두 주일 동안에 회생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알지 못하였으나, 감사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때부터 나를 부르셨나이다. 그때 처음 마근태 목사에게 그리스도 예수 씨 복음을 전해 듣고 성경책도 얻어 보았나이다.(그리스도 신문, 1901. 9. 9)”

이때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두 목사는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로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선교회(Scottish United Presbyterian Mission)에서 1872년 중국으로 파송되어 중국 동북지방 요녕성의 우장(牛莊)과 봉천(현 심양), 고려문(高麗門)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었다.

고려문이라는 곳은 의주에서 48㎞ 떨어져 있는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있는데, 목책을 둘러친 국경경비 시설이 있었다고 해서 책문(柵門),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 또는 병자호란 때 잡혀간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고려문(高麗門)으로 부르기도 했다. 옛 중국 사신들이 압록강 건너 처음 만나는 만주 관문인데, 그곳에는 의주의 관리들이 파견되어 상주하는 별정소(別定所)가 있었다.

두 목사는 조선 선교를 위해 조선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천주교 탄압 등의 여파로 조선사람들이 서양사람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하여 쉽지 않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존 로스는 1874년 의주에서 온 홍삼장수 청년 이응찬(李應贊)을 만나 한국말을 배웠다. 그는 3년 후 외국 선교사를 위한 한글 문법책 <Corean Primer(1897)>을 펴냈다. 메킨타이어 목사는 1875년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을 만나 1876년에 세례를 주어 이들이 한국 최초의 개신교인이 되었다.

1887년에 비로소 신약성경이 완간되었으니, 이 성경이 '예수성교전서(예수聖敎全書)'로서 ‘로스역본(Ross Version)’이라고도 한다. ⓒ천지일보 2018.8.23
1887년에 비로소 신약성경이 완간되었으니, 이 성경이 '예수성교전서(예수聖敎全書)'로서 ‘로스역본(Ross Version)’이라고도 한다. ⓒ천지일보 2018.8.23

로스는 이 의주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한문 신약성서를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879년 안식년 휴가 전까지 그는 마태복음에서 로마서까지 번역했다. 1879년 개종한 서상륜도 로스 목사의 권유로 봉천(심양)으로 가서 성경번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학식이 높았던 서상륜이 참여하자 한글성서번역은 활력을 띠었다. 먼저 누가복음이 번역되었고 이어서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만주에서는 번역한 성경을 인쇄할 활자가 없어 일일이 한글 글씨를 써서 일본에 보내 납활자를 만들어 와서 마침내 1882년 3월 24일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3천 부, 5월 12일에는 ‘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가 선양의 문광서원에서 발행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쪽 복음 성경이 되었다. 아직 신약성서 전체가 번역되지 못해 각 복음서가 따로따로 나뉘어 간행되어 ‘쪽 복음성경’이라 했다.

1883년에는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이 1884년에는 마태복음이 출간되고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출간되었으며 1887년에 비로소 신약성경이 완간 되었으니, 이 성경이 <예수성교전서(예수聖敎全書)>로서 ‘로스역본(Ross Version)’이라고도 한다.

소래교회 ⓒ천지일보 2018.8.23
소래교회 ⓒ천지일보 2018.8.23

권서들의 파견

1882년 한글 쪽 성경이 나오자 로스 목사는 한글 쪽 성경 3천부 중 1천부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일본 총무 릴리(Lilly)에게 보내고, 서상륜에게 500권의 한글 쪽 성경과 그 밖의 기독교 관계 소책자들을 주어 봇짐에 지고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며 팔면서 전도하는 문서 전도인인 ‘권서(colporteur)’ 훈련을 시켰다.

한국의 개신교 역사에서 권서의 역할은 빛났다. 이들은 무보수로 무거운 수백 권의 단편성경을 지고 시골길을 다니며 팔거나 배포하여 예비 신자들을 모아 놓으면 선교사들이 이들을 가르쳐 세례를 주었다. 식자공으로 참여했던 김청송(金靑松)도 쪽 성경을 간도로 가져가 많은 예비신자를 확보하여 1882년 11월 로스는 웹스터(Webster)와 함께 북간도 한인촌으로 가서 75명에게 세례를 주어 간도지역 개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상륜이 남만주 일대에서 권서로서 경험을 쌓자 로스 목사는 서상륜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1883년 서상륜은 성경을 봇짐 속에 숨겨 국내로 들어오려다 고려문의 국경 검문에 성경이 발각되어 별정소에 투옥되었다. 마침 그 별정소에 김효순과 김천련이라는 아는 사람이 의주부 집사로서 파견 나와 있었다. 그들은 서상륜을 보고 놀라 탈옥을 도왔다. 그들은 옥문에 자물쇠만 끼어놓고 잠그지 않았고, 밖에 말 두 필을 세내어 놓아 김효순이 직접 어두운 밤길을 안내했다. 급박한 탈출의 와중에서도 서상륜은 압수당한 복음서를 찾아줄 것을 강청하여 10여권을 품에 지니고 떠나게 되었다.

서상륜과 비슷한 시기에 최초의 네 개종자의 한 명인 백홍준도 국내에 권서로 파송되었다. 그는 성경을 국경 넘어 들여올 방법이 없자 성경책을 분해하여 그 종이로 노끈을 꼬아 봇짐의 멜빵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국내로 한글 성경을 들여오는데 성공하여, 멜빵 노끈을 다시 풀어 성경책을 제본하여 고향 의주의 인근 주민들에 은밀히 배포하며 전도하였다.

이렇게 탈옥자가 되어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서상륜은 동생에게 당부했다.

“외6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장연군 봉대로 내려가 숨을 것이니, 너는 속히 가산을 정리하여 할머니를 모시고 봉대로 내려오너라.”

서상륜은 이런 부탁을 남기고 그 길로 그를 안내한 사람과 함께 말을 타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봉대리로 숨어들었다.

봉대로 들어온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는 20리 떨어진 소래마을 유지인 김윤방과 친분을 쌓고 전도하게 되었다. 이 김윤방이 김마리아의 아버지이며, 김필순의 형이다. 서상륜은 열심히 전도한 결과 20여명이 믿게 되고, 1884년에 주민들의 힘으로 초가집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이 예배당이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솔내(松川)교회이다.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가 공식 입국하기 1년 전이었다. 아우 서경조는 최초의 한국인 장로교 목사 중 한명이며, 독립운동가 서병호, 서원석(대한성서공회), 서경석(목사) 등이 모두 그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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