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이회영, 이은숙 부부 등 이주 독립운동가들이 개척한 신흥강습소 터(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천지일보 2018.10.25
이회영, 이은숙 부부 등 이주 독립운동가들이 개척한 신흥강습소 터(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천지일보 2018.10.25

“안동현에서 횡도촌은 5백리가 넘는지라. 입춘이 지났어도 만주 추위는 조선 대소한(大小寒) 추위는 비(比:비교)치도 못하는 추위이다. 노소 없이 추위를 참고, 새벽 4시만 되면 각각 정한 차주(車主: 수레 주인)는 길을 재촉해 떠난다.”

‘서간도 시종기(始終記)’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76~1930) 선생의 아내 이은숙 여사의 회고록이다. 위의 내용은 1911년 1월 9일 독립운동 기지개척을 위해 우당 선생 6형제가 전 재산을 팔아 압록강 건너 안동현에서 마차 10여 대로 서간도 지역인 지린성 환인현(桓仁縣) 횡도촌(橫道村)으로 가던 장면이다.

이은숙 여사는 1889년 충남 공주에서 아버지 이덕규와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의 외동딸로 곱게 자랐다. 이회영은 1907년 첫 부인 서씨를 사별하고, 이듬해인 1908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이은숙 여사와 재혼했다. 당시 상동교회는 신민회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이었고, 이회영은 상동교회 학감을 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북경 시절의 이회영 선생(앞줄 오른쪽) ⓒ천지일보 2018.10.25
북경 시절의 이회영 선생(앞줄 오른쪽) ⓒ천지일보 2018.10.25

이 책에는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대대로 정승 판서를 배출해온 가문으로서 우당 6형제가 국가가 어려워졌을 때 먼저 희생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발휘하여 양반 대가의 가산을 정리하고, 일가족 40여명을 이끌고 만주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러 떠나는 장면, 독립운동기지 개척의 어려움,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던 일, 돈이 떨어져 어려운데도 매일 우당 선생을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했고, 돈이 떨어지면 멀건 죽밖에 대접할 수 없었던 민망함과, 달리 도움 받을 사람이 없어 만삭의 몸으로 이런 일을 해내야 했던 힘든 내조의 삶 등이 나온다. 다음은 그중의 한 구절이다.

“만세(3.1운동: 필자) 후에 상해에다 임시정부 건설했다는 소문이 사면에 파다하여 애국지사들이 매일 5, 6명씩, 적을 때는 2, 3명씩 오는 대로(박승봉, 박찬익, 이승복, 이해창, 유진태 제씨) 대접하였다. 집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 남자고, 며느리는 저의 오라범이 데려가고 여자라고는 9세 된 딸년과 나뿐인데 임신 8, 9삭에 오죽이나 어려우랴.”

회고록 곳곳에는 망명 독립운동가 가족이 외국에서 당면했던 곤궁한 현실이 나타난다. 다음의 구절들도 그런 예들이다.

“집은 협소하고 식구는 많아 있을 수가 없으니 진스방자 얼안중(二眼井)이라는 곳으로 이사하니 망명객의 거처라 아마 1년에 수십여 번 이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경신, 신유(1920~21) 1, 2년간은 그럭저럭 손님 대접과 만세 소동에 동지들이 사업비와 생활비 겸하여 혹 보내주더니, 그나마 3, 4년 후에는 단 일 푼 보내주는 이 없었다.”

“하루 잘해야 일중식(日中食: 하루 1끼)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絶火: 밥을 짓지 못함) 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生不如死: 죽는 것만 못한 어려운 삶)로다. 노소 없이 형용(形容)이 초췌한 중에 노인이 어찌 견디리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유명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76~1930) 선생의 아내 이은숙 여사. 이은숙 여사는 묵묵히 뒤에서 독립운동을 도왔다. ⓒ천지일보 2018.10.25
유명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76~1930) 선생의 아내 이은숙 여사. 이은숙 여사는 묵묵히 뒤에서 독립운동을 도왔다. ⓒ천지일보 2018.10.25

회고록에는 돈이 떨어져 곤궁한 형편을 보다 못해 이은숙 여사가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 위해 직접 국내로 들어와서 치룬 다음과 같은 고생담도 있다.

“그날부터 일감을 얻어 빨래를 해서 잘 만져 옷을 지어주면 여자 저고리 하나에 30전, 치마는 10전씩 하고, 두루마기 하나에는 양단이나 합비단은 3, 4원하니, 두루마기나 많이 있으면 입양이 넉넉하겠지만 두루마기가 어찌 그리 있으리오.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 가량 되니, 그도 받으면 그 시로 부쳤다. 매달 한번씩은 무슨 돈이라는 건 말 아니하고 보내드렸는데, 우당장(이회영)께서는 무슨 돈인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쓰시니, 우리 시누님하고 웃으며 지냈으나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드리게 되는 것만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이은숙 여사는 한번도 독립운동 단체에 소속해서 직책을 맡거나 총을 들고 적과 대치하여 전선에 섰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던 남편과 함께 국내에 있든 국외에 있든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다. 그녀의 희생과 헌신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우당 선생이나 독립운동 지도자의 활동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훨씬 어려움이 많았을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렇게 독립운동을 뒤에서 도운 이은숙 여사는 광복이 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립운동가로 포상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명우 선생의 부인 권성 여사가 세 아들에게 남긴 유서 계삼아(戒三兒) ⓒ천지일보 2018.10.25
이명우 선생의 부인 권성 여사가 세 아들에게 남긴 유서 계삼아(戒三兒) ⓒ천지일보 2018.10.25

경북 봉화 닭실(유곡 酉谷)마을 출신의 권성(權姓, 1868~1920)은 호적에 ‘권씨성 부인’이라는 뜻으로 권성이라 올려 이름 없는 존재가 되었다. 당시 여성 지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17세 때인 1885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의 이명우(李命羽, 1872~1920)와 혼인하였다. 남편은 그녀보다 4살이나 아래로, 1894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진사가 되었고, 마지막 유림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이었다. 이명우는 1905년 을사늑약에 절망하고, 1910년 경술국치로 망국 사태를 당하자 목숨을 끊어 항의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생존하여 불효를 저지를 수 없어 미루었다. 부친에 이어 1918년 10월(음) 모친상을 치렀다. 이어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고종)가 서거했다. 광무황제 1년 상을 마치는 1920년 음12월 20일(양력 1921년 1월 28일) 남편 이명우는 마침내 자결하리라 결단을 내렸다. 권성도 남편을 따르리라 결심했다. 자결 하루 전인 음력 12월 19일 저녁, 권성 부부는 유서를 남긴 후 독을 마시고 눈을 감았다. 권성이 며느리에게 남긴 유서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얘들아 너희들을 슬하에 두어 주옥같이 여겨 사랑한 마음 비할 데 없더니, 장래 재미를 보지 못하고 이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영원히 헤어지니 너의 어린 생각에 원통할 듯하지만 인륜대의에 어찌하겠느냐? (중략) 너의 시아버지께서 충성과 절의를 지키셔서 목숨을 다하시니 내 어찌 좇지 아니하겠느냐? 인륜대의에 작은 사정을 다 생각하지 못한다.”

이처럼 치열하게 민족적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정신을 가진 권성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전통시대 여성들은 ‘대문 안, 남편 아래, 아들 뒤’에 있었다. 그러나 외세침략으로 나라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같이 되자 더 이상 여성들이 대문 안, 남성들의 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1895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들고 장흥부를 공격한 동학군의 지도자는 22세의 이소사(李沼史)라는 여성이었다. 1898년 9월 8일 최초의 여성단체 찬양회(讚養會)[일명 순성학교부인회(順成學校婦人會)]가 100여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결성되어 여학교 설립 청원을 했으며, 민회 설립을 요구하는 만민공동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 점차 여성들도 국권회복과 독립운동 참여했는데, 여성이었기 때문에 대문 바깥 독립운동과 동시에, 대문 안 자신의 가족과 동지들 가족들을 돌보아야 하는 이중의 과업을 안게 되었다.

광복 이후 70여년이 지나는 동안 1만 4830명(외국인 69명 포함, 국가보훈처 2017. 12. 31 통계)이 독립운동가로 포상되었다. 그중 여성은 외국인 4명을 포함하여 296명이다. 전체 독립유공 포상자의 2%에 불과한 실정이다.

독립유공자 포상현황 ⓒ천지일보 2018.10.25
독립유공자 포상현황 ⓒ천지일보 2018.10.25

독립운동의 세계가 주로 남성의 영역인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나, 독립운동의 기간이 1~2년 또는 4~5년이 아니라 반세기, 두 세대 또는 그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는 긴 기간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참여와 지원 없이는 지속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성독립운동가 포상에 저조했던 데에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 여성이 윤희순 여사나 유관순 열사와 같이 뚜렷하게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경우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독립운동을 입증할 만한 신문보도도, 취조기록이나 판결문도 없으며, 독립운동 단체에 직함이나 이름조차도 없이 아버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뒤에서 독립운동을 도우며 모든 어려움을 감내했다. 그러한 노력이 독립운동에는 절대적인 힘이 되었을 것이나,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글 한줄 없는 경우도 많다. 또한 여성들의 희생과 노력이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이런 점들이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에 가로놓여 있는 어려움들이다.

다행히 올해 정부가 여성들에 대해서는 최소 3개월 옥고 요건을 완화하여 옥고를 치르지 않았더라도 독립운동 사실이 있으면 포상을 하기로 했다. 또한 판결문이나 신문보도 기사 등 자료가 없는 경우 회고기록 등도 근거로서 인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이은숙 여사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이번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 남편 이회영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