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9.9절 전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에 가는 일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시진핑 주석은 어떤가? 그의 평양방문은 기정사실로 되어가고 있다. 두 정상이 평양에서 일방적인 ‘종전선언’을 할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무시하고 1994년 군사정전위원회도 일방적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만든 것이 ‘조선인민군판문점 대표부’이다. 쌍방이 합의한 군사정전체제도 박차고 나가는 북한이 전쟁의 종식을 선포하는 정치적인 종전선언에 주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만약 두 정상이 이번 9.9절에 종전을 선언한다면 미국은 난처해질 수 있다. 가뜩이나 미국은 북한과 중국에 ‘침략자’ ‘호전광’으로 선전돼 있는데 종전선언에 불참하고 계속 ‘전쟁준비’에 광분한다고 북한 당국이 선전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아직 김정은에 대해 잘 모른다. 트럼프는 생뚱맞게 김정은은 김일성이나 김정일보다 터프하다고 추켜세웠다. 칭찬인지, 비판인지 아리송한 말로 평양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고 있다. 김정은은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질풍노도 같은 사춘기를 스위스에서 보냈다.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와 독어는 기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전언도 있다. 그는 유학 시절에 스키와 농구를 즐겼다고 한다. 스위스제 명품시계를 차고, 에멘탈 치즈를 즐겨 먹었다. ‘조선의 알프스’를 만들겠다며 스위스식 잔디밭과 물놀이 파크 조성을 북한 관리들에게 다그쳤다. 스위스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과연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첫째, 그는 스위스의 관광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스위스는 국토의 60%가 산악이다. 지형적으로 불리한 점을 관광자원으로 변모시켜 역발상에 성공했다. 스위스의 연간 관광수입은 40조원을 훌쩍 넘는다. 향후 김정은은 외화벌이를 위해 ‘핵 없는 북한’ 마케팅을 내세워 마식령 스키장과 원산 갈마 관광지구 같은 관광산업 진흥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는 스위스에 ‘대충’이란 단어가 없다는 점을 인식했을 것이다. 일례로 스위스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는 26명으로 세계 6위다. 인구 대비 세계 1위다. 1인당 국민소득은 8만 달러다. 국가경쟁력 지수나 국민행복지수(GNH)도 세계 1~2위를 다툰다. 이런 기록은 극도로 강한 프로페셔널리즘과 장인정신이 뒷받침한다. 최근 김정은의 현지지도에서 당 간부와 관리들에게 “너절한” “뻔뻔한” “돼먹지 못한” 같은 매서운 질타들이 쏟아졌다. 스위스식 완벽주의에 익숙해져 있을 그가 대충대충 넘어가려는 너절한 현장에서 체감하는 스트레스도 만만찮을 것이다.

셋째, 그는 스위스에서 ‘우리식 국가발전’의 모델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스위스는 독일·프랑스·이탈리아 같은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영세중립국으로서 ‘자주성’을 고수한다. 유럽연합(EU)에 가입하지 않고도, 견실한 경제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스위스는 풀뿌리 기층 단위에 촘촘한 상호감시의 네트워크가 깔려있다. 낯선 사람이 동네 마트에 들락거렸다가는 어느새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꼼꼼한 신원확인을 피할 수 없는 곳이 스위스다. 웬만한 관광지에 가보면 당국의 ‘제초작업’ 수준에 경악할 것이다. 하지만 단기 체류 관광객들은 이러한 안전과 질서와 청결을 강제하는 메커니즘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만일 유사한 네트워크가 북한에서 작동된다면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한 별도의 ‘모기장’은 필요가 없다. 

끝으로, 김정은은 스위스 특유의 산악적 속성을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배타적인 ‘섬나라 근성’과 비슷하다. 산골짜기마다 맥주 맛과 치즈 맛도 제각각 다르다. 겉으로 외부인들에게 개방적이고 친화적인 것 같지만 여간해서는 속내를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지리적으로 유럽대륙의 중심에 있지만 실제로는 고립된 섬 같은 위상을 오히려 선호한다. 김정은에게 이러한 이중성은 ‘겉 따로, 속 따로’의 편리함에 따라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매력적인 영감을 제공해 주고 있다. 김정은에게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물질적 풍요와 여유가 일상 속에 배어있는 스위스의 기억이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관광자원의 현금화에 절실한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북제재 해제에 전력투구하려 한다. 종전선언에 적극적인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자칫 시진핑과 김정은의 일방적인 종전선언을 보며 미국이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의 난처함에 부딪치지 말기 바란다. 보다 중요한 것은 김정은은 당장 통일보다 ‘분단체제’를 선호하며, 그래서 종전선언은 더욱 갈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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