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 5 – 표트르의 개혁과 저항
[역사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 5 – 표트르의 개혁과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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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709년 6월 27일 폴타바 전투에서 승기(勝機)를 잡은 표트르 대제는 그 해 가을에 발트해 연안의 스웨덴 땅을 빼앗았다. 1714년에는 스웨덴 함대를 격파하고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을 위협했다. 1714년 11월에 카를 12세가 스웨덴으로 귀환했다. 그는 전열을 가다듬고 병력을 6만명으로 증강했다. 그런데 카를 12세는 1718년 11월 전방 시찰 중에 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표트르는 여세를 몰아 스웨덴을 공격했다. 1719년에는 스톡홀름 가까이까지 진격했다. 이러자 서유럽 열강들은 러시아가 지나치다고 여기면서 견제에 나섰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명실공히 ‘유럽으로 향한 창’이 됐다. 표트르는 ‘서유럽을 배우자’는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강한 군대와 문화를 배워 러시아를 세계 제1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1711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신문 ‘베도모스티’가 발행됐고 복잡한 키릴문자를 간결한 문자로 바꾸었다. 표트르는 1715년에는 해군사관학교, 1721년에는 포병학교를 세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수많은 관공서와 학교와 박물관, 극장, 공원 등이 세워졌다.  

하지만 개혁에는 언제나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1718년 6월 26일에 왕세자 알렉세이(1690∼1718)가 페트로파블롭스키 감옥에서 갑자기 죽었다. 왜 급사했을까? 알렉세이는 반(反) 표트르파와 유착돼 있었다. 개혁에 피해를 본 귀족과 종교 세력들은 표트르를 암살하려 했다. 여기에 알렉세이도 관련되었는데, 암살 계획이 발각되자 동서인 카를 6세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도망갔다. 

표트르는 알렉세이를 용서하겠다면서 귀국을 종용했다. 1718년 1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알렉세이는 곧바로 조사를 받았다.  6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는데 6월 24일에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됐고, 이틀 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내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719년 즈음의 러시아 해군은 영국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1721년 9월 10일 드디어 니슈타트(현재 핀란드 지역의 도시) 조약이 체결됐다. 21년간의 전쟁이 종결된 것이다. 러시아는 리가에서 비보르크까지 발트해 연안을 손에 넣었고, 잉그리아·에스토니아·리보니아 및 카렐리아의 일부 영토를 차지했다. 한 달 후인 10월 22일에 원로원은 표트르에게 황제 칭호를 바쳤다. 러시아 제국이 공식 출범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렵 표트르는 요독증에 시달렸고 알콜 중독자가 돼 있었다. 마지막 위기는 1724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보트 사고였다. 표트르는 차가운 물속에 직접 뛰어 들어가 익사 직전의 승무원들을 구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폐렴에 걸려 1725년 2월 8일에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30일간 겨울궁전에 안치된 후에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에 묻혔다. 

표트르 대제(Pyotr, The Great)! 러시아를 변혁시킨 위대한 지도자는 이렇게 떠났다. 후임으로 황후 예카테리나가 러시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1727)는 원래 라트비아 농부의 딸인데 스웨덴과의 전쟁 때 포로였다. 표트르는 그녀의 미모와 순종에 반해 1712년에 황후로 삼았다. 그런데 예카테리나 1세는 정부(情夫) 멘시코프에게 권력을 맡기고 환락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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