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 3 – 여름 궁전의 삼손분수
[역사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 3 – 여름 궁전의 삼손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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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페테르고프를 갔다. 페테르고프는 ‘표트르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1714년에 표트르 대제는 핀란드 만을 마주 보는 이곳에 여름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분수공원은 환상이다. 특히 삼손이 사자 아가리를 찢는 분수는 장관(壯觀)이다. 물기둥 높이가 20m나 되는 삼손분수는 1709년 6월 27일에 러시아가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에게 이긴 것을 기념해 1735년에 만들었다.  

1706년에 스웨덴의 젊은 사자 카를 12세는 폴란드로 진군했다. 스웨덴 군은 잇달아 승전보를 올렸다. 폴란드 아우구스트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항복했다. 

1707년 12월에 카를 12세는 4만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첫 전투에서 카를 12세는 표트르를 물리치며 러시아군을 멀리 퇴각시켰다. 그러나 이 퇴각은 청야작전(淸野作戰)을 동반한 퇴각이었다. 스웨덴군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는 눈보라를 뚫고 하루 종일 행군하며 불타 버린 농가와 곡식창고만을 만나는 나날을 거듭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스웨덴 보급부대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보급마저 끊기었다.  

1708년 10월에 카를 12세는 우크라이나로 방향을 돌렸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반군 지도자 이반 마제파와 5천명의 카자크 인들이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남쪽의 초원에서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표트르는 청야작전으로 스웨덴 군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1708년 겨울은 스웨덴 군에게 혹독했다. 수많은 병사가 얼어 죽거나 동상에 걸렸다.       

하지만 카를 12세는 절대 기죽지 않았다. 1709년 봄이 되자 카를 12세는 남은 병력 2만명으로 우크라이나의 요충지 폴타바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6월에 표트르가 이끄는 5만명의 러시아군이 도착했다. 러시아 군은 10년간의 국방 개혁으로 눈부시게 전투력이 향상됐고 무기도 한층 강력해졌다. 

카를 12세는 2만명 중 6천여 병력을 포위하고 있는 곳에 남겨두고   1만 4천명을 이끌고 표트르와 싸우려 출정했다. 안타깝게도 6월 17일에 카를 12세는 저격병의 총에 다리를 맞아 일어나지 못했고, 칼 구스타브 렌셸드와 아담 레벤하우푸트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6월 27일 늦저녁에 스웨덴 군은 기습공격을 했다. 스웨덴 군의 기습은 성공해 러시아 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트르는 기병을 투입해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에 전군을 후퇴시켜 야전 진지로 들어갔다. 

이윽고 레벤하우프트가 지휘하는 스웨덴 군은 러시아 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치명적인 것은 렌셸드의 보병 3천명이 맹렬한 포격을 받아 1천명 이상 사상 당한 것이다.    

표트르는 즉각 반격을 명령했다. 러시아 보병은 스웨덴 보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기병도 돌격하자 스웨덴 기병이 무너졌다. 이어서 러시아 기병은 스웨덴 보병을 공격했다. 카를 12세는 패배를 깨닫고 가까스로 1500명의 병력만 수습해서 오스만튀르크로 탈출했다. 러시아군은 수천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는 인부로 동원됐다.

표트르 대제는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렇게 외쳤다. “병사들이여, 이제 조국의 운명을 결정할 때가 왔다.” 

시베리아의 곰 러시아는 1700년부터 시작된 북방의 사자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기(勝機)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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