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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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은 조선후기 대학자로서 실학을 집대성했는데, 1762년(영조 38)생이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나고 243년 이후에 출생했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 향년 49세를 일기(一期)로 정조가 의문의 승하를 하면서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 들었는데 그 이듬해에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 사암(俟菴)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으나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3대 저서를 비롯해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후세에 남겼다.

사암은 이러한 업적이외에 건축가, 의학자, 교육자, 시인으로서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니 가히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사암은 어떤 삶의 발자취를 남겼는지 살펴본다.

사암은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한 1762년(영조 38) 음력 6월 16일(양력 8월 5일) 사시(巳時, 현재 오전 11시)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숙인(淑人) 해남윤씨(海南尹氏) 사이에 3남 1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사암이 마현리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는 마재에서 출생하게 된 유래는 5대조가 되는 정시윤(丁時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시윤은 1694년(숙종 20)에 발생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해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면서 남인들이 타격을 받게 되기에 이르렀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2년 후인 1696년(숙종 2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으로 제수됐지만 그 이후 관직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 고심을 하게 된 정시윤이 결단을 내려 서울을 떠나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해지는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 지역으로 이주하니 바로 그 곳이 사암이 출생한 마재였던 것이다.

사암의 본관은 나주(羅州)로서 8대가 연속적으로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간 명문이었으며, 모친 해남윤씨는 윤덕렬(尹德烈)의 딸로서 조선중기 문신이면서 시조작가(時調作家)로서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와 ‘오우가(五友歌)’로 유명하였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5대 손녀이며, 더불어 시(詩), 서(書), 화(畵) 등 삼절(三絶)로 명성을 떨쳤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가 된다.
 

다산 정약용 동상 ⓒ천지일DB
다산 정약용 동상 ⓒ천지일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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