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적인 거장으로서 다방면에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이와 관련해 레오나르도 다빈치하면 최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화가로서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렸다는 것이며, 과학자(科學者),발명가(發明家), 건축가(建築家)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 피렌체 빈치에서 출생해 1519년 프랑스 중부지역에 위치한 앙부아즈성에서 향년(享年) 68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으니 사실상 70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상을 떠난 1519년은 조선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이탈리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었다면 조선에도 다방면에 천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본 칼럼에 소개하는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이다.

여기서 정약용의 호(號) 사암과 관련해 언급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필자는 그동안 정약용의 호를 다산(茶山)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정약용의 행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다산 이외에 또 다른 호인 사암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정약용은 이러한 호 이외에도 삼미자(三眉子),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 탁옹(籜翁), 열초(洌樵), 균암(筠菴) 등의 호가 있었으며,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었다.

다산 정약용 생가인 여유당 현판 ⓒ천지일보DB
다산 정약용 생가인 여유당 현판 ⓒ천지일보DB

본래 다산이란 호는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10년동안 생활하면서 그 지명을 따라 다산이라는 별호(別號)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1818년(순조 18)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마재로 귀향한 이후 사암이라는 호를 사용한 점을 주목한다.

이와 관련해 1822년(순조 22) 정약용이 회갑연(回甲宴)을 맞이하면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묘지명(墓誌銘)에 자세히 남겼는데 묘지명이란 망자(亡者)의 생전행적을 기록한 글을 일컫는 것이나 정약용은 생전에 묘지명을 직접 지었던 것인데, 이러한 묘지명을 지으면서 호를 사암으로 했다는 것인데 정약용이 묘지명에 호를 사암이라 했던 점에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뜻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본 칼럼은 정약용의 호를 사암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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