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시]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마음이 머무는 시]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 할머니의 슬하

문인수(1945~  )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 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내엔 그러니까 아직도
상처와 기억들이 잘 썩어 기름진 가임의 구덩이가 숨어 있는지
할머니, 손수 가꿨다며 호박잎 묶음도 너풀너풀 흔들어 보인다.
 

[시평] 

아파트 단지 인근이나, 지하철역을 지나다 보면, 할머니들이 손수 농사를 지으신 것으로 생각되는 농산물들을 벌려놓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한 움큼의 고추며, 호박이며 나물 등을 좌판도 아닌 좌판 위에 진열 아닌 진열을 해놓고, 하염없이 앉아 계신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무릎을 세운 채 쪼그려 앉아 있는 할머니들은 힘이 드신지, 마치 온몸을 구부려 모두 몸속으로 집어넣듯이, 푹 꺼진 모양으로 앉아 계신다. 당신의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마냥 두 무릎을 곧추 세운 채, 푹 땅으로 꺼진 듯이 앉아 계신 할머니들. 

앞에 늘어놓은 고추며 호박이며, 가지 등의 야채들,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할머니의 무릎 아래서 자라는, 말 그대로 슬하(膝下)의 어린 것들 아니겠는가. 무언가를 입으로는 우물우물 씹으시면서, 혹은 지나가는 아낙에게 물건을 사가라고 부르는 그 손짓. 마치 허공중에 덧없이 그려는 반경과도 같다.

할머니들, 오늘도 도심 아파트 인근이나 지하철역 인근, 당신이 낳고 또 기른 듯한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벌려놓고, 멀고 먼 하늘바라기만 하염없이 하고 계신다. 온몸을 구부려 몸속으로 집어넣듯이, 쭈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바쁘게 지나치는 세상의 사람들 발걸음이나 세고 계시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