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9시(한국시간 10시)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70년간 이어져온 마지막 냉전이 종식될지 주목된다. 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싱가포르 지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모습 (출처: 게티이미지, 뉴시스)
12일 오전 9시(한국시간 10시)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70년간 이어져온 마지막 냉전이 종식될지 주목된다. 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싱가포르 지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모습 (출처: 게티이미지, 뉴시스)

광복 이후 미-소, 한반도 허리 잘라
1953년 7월 미-북, 정전협정 서명
‘한반도 비핵화’ 기회 번번이 놓쳐

[천지일보=손성환 기자] ‘세기의 회담’으로 불리는 북미정상회담의 날이 밝았다. 오늘(12일) 싱가포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서 ‘격동의 70년’이라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물꼬를 틀 기회를 다시 잡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일 싱가포르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한 번의 기회가 낭비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흥미로운 하루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에어차이나 항공기를 이용해 10일 오후 2시 35분경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했다. 트럼프 대통령보다 먼저 도착해 세기의 회담 준비에 나섰다.

1948년 남북 분단 이후 70년 만에 다시 만난 북미는 이번 ‘세기의 회담’을 통해 냉전의 마지막 철조망을 끊고 앞으로 이어질 남북미 회담 등 평화의 물꼬를 틀지 기대된다.

◆냉전시대 강대국, 38선 그어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이 미국과 구(舊)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면서 분단이 시작됐다.

한반도가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 외상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간의 신탁통치를 할 것으로 합의했고,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찬·반이 갈렸다. 이에 미국은 1947년 9월 유엔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1948년 38선 이남에서 총선거가 실시된 후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면서 남북이 분단이 됐다. 군사분계선 38선이 남북의 국경선이 돼버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소련의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남침을 개시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동시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돼 16개국이 참전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낙동강 방어선의 한국군·유엔군은 총반격하면서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계속 북진했다. 하지만 10월 하순경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후퇴하게 됐다. 중국의 개입은 소련이 승인하면서 이뤄졌다.

1951년 6월 23일. 한국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면서 양측 강대국들은 유엔에 휴전을 제의했고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휴전 감시기구는 체코·스위스·스웨덴·폴란드 등 4개국이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할 것에 합의했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에 조인하면서 한국전쟁은 휴전하게 됐다. 당시 월리엄 해리슨 유엔군사령부 중장과 남일 북한 인민군 대장이 판문점에서 각각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1991년 남북, 한반도 ‘비핵화’ 선언

북한은 미국의 핵 위협을 이유로 1950년대 말부터 소련과 연구협력을 시작해 핵 개발에 나섰다. 이에 1963년 6월 연구용 소형 원자로를 도입했다. 1986년 북한은 5㎿급 흑연감속로를 가동해 매년 6㎏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되면서 1990년 9월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의 수교 방침을 밝혔다. 당시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은 여기에 분노하며 소련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독자적 핵개발에 나서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1991년 9월 27일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전 세계 미군기지에서 전술핵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18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한국 어디에도 핵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남북은 12월 31일 핵무기에 대한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하지 않고 재처리 시설,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으며, 비핵화 검증을 위해 사찰을 실시한다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카터 미 대통령, 김일성 만나

1992년 1월.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조처 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해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이 있는 영변을 타격하기 위해 검토에 들어갔다. 하지만 미군 사상자 5만명, 한국군 49만명, 민간인 100만명 이상의 피해가 난다는 예측에 이를 포기했다.

이러한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당시 북한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갖고 핵 개발 동결과 남북정상회담 약속을 했다. 1994년 10월. 북미는 미국 등이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고 북한은 핵 동결을 한다는 제네바 합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첫 장거리 탄도미사일 대포동 1호를 발사하면서 이번엔 미사일 문제가 대두됐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11월 대북 강경파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에 임명했다.

◆北 조명록, 클린턴 만나 공동성명

하지만 햇볕정책 설계자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페리를 설득하면서 강경정책은 바뀌었다. 1999년 10월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 계획을 전면 중단하도록 유도하고, 한반도 냉전을 종식시킨다는 대북포용정책의 보고서가 완성됐다.

2000년 7월. 타이 방콕 아시아지역안보포럼(ARF)에서 첫 북미 외교장관 회담이 열렸고, 이를 계기로 10월 10일,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만나 ‘적대 관계를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 23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평양을 답방했고,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찰나였다.

◆아들 부시, 제네바 합의 파기

200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아들 조지 부시가 당선되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취소됐다. 2001년 9.11 테러를 당한 이후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선포했다. 이어 미국 실무진은 평양을 방문한 이후 핵개발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 2003년 1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美, 대화 단절… 北, 핵+ICBM 개발

이후 남북한·미·중·일·러 등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전략적 인내’를 내세우며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

2012년 5월 북한은 헌법에 핵 보유국을 명기했고, 2013년 3월 핵개발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병진노선을 채택했다. 이어 북한은 6번의 핵실험을 하고, 2017년 11월 화성-15형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미국 워싱턴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완성했다고 선포했다.

◆2018년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

2018년 6월 12일 오늘, 싱가포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 70년 세월의 끝나지 않은 냉전을 종식할 기회를 갖는다. 1953년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인 북미가 다시 만나 ‘비핵화’ 접점을 찾고 이후 남북미 ‘종전선언’을 통해 세계 대전의 마지막 철조망을 걷어내는 첫 걸음을 이날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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