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트럼프 대통령의 엄포에 북한이 설설 기는 모습이 안쓰럽다. 물론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다시 한번 불을 당겼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다시 싱가포르 회담의 재선언을 선포하고 북미정상회담을 순리 있게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북한 체제가 미국이란 거대한 강국과 정상회담을 치루기에 여러 가지로 미숙한 점이 너무 많아 보인다. 미국은 왜 그랬을까? 대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선, 전문가 없이 핵폐기 ‘행사’를 진행해 핵 기술 수준을 가늠하고 핵실험장을 살펴보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더욱이 북한은 이미 6차례 핵실험으로 핵 무력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핵실험장 폐기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국제 전문가 집단의 강제 사찰과 무한검증을 비켜 가기 위해 사전에 봉쇄해 버린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가 배제된 것 또한 우려스럽다. 이 행사가 실제로 북한의 핵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미국과 한국의 기술자들을 초대해 핵실험장에 어떤 장비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했어야 했다. 갱도에 들어가 계측장비, 조립장치 등을 보여준 다음에 무너뜨렸어야 했다.

게다가, 동쪽 1번과 북쪽 2번 갱도는 과거 북핵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기에 이번 폭음은 축포가 아니라 애포(哀砲)였다. 2006∼2017년 사이 만탑산의 사계(四季)가 아로새겨진 구중심처는 폭발로 잔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2번 갱도는 북핵의 보고(寶庫)와도 같았다. 한반도에선 유일하게 1억 도라는 고온을 다섯 차례나 겪은 화강암이 빚어낸 석영이 존재하는 동굴. 천장과 바닥엔 우라늄 235, 우라늄 238, 플루토늄 239, 플루토늄 240, 헬륨 4, 리튬 6가 널브러져 있다. 효율이 낮았던 북핵 기술로 핵실험 때마다 99% 넘는 핵물질이 반응하기도 전에 공중 분해한 것이다. 암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6차 핵실험의 위력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핵실험의 추억, 그동안 방사성물질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막고 있었던 수십 개의 차폐문, 거기엔 아직도 절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30년 가까이 걸리는 세슘과 스트론튬이 스며든 빗물과 함께 수맥을 따라 지하수로 빠져들고 있다. 그 지하수를 빨아들인 나무와 풀이 자라나고, 방사성 풀을 뜯어 먹은 젖소는 어느 날부턴가 방사성 우유를 만들고, 길주와 김책의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우유를 마셨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오늘 북핵은 한국이나 미국을 위협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를 상해하고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20년 후 발병할지도 모를 그 누구의 백혈병이나 위암, 골수암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2번 갱도만은 폭파하지 말고 보존한 다음 적어도 1∼2년 국제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받아 광범위한 지질조사와 환경평가를 동시에 하고, 지하수 지도를 만들어 바닥을 콘크리트로 막고, 남은 핵물질은 긁어내고, 방사성물질은 씻어내고 자갈, 모래로 갱도를 100m 넘게 메운 다음 입구를 강화 콘크리트로 막는 방식을 택했어야 했다. 북한은 체르노빌의 교훈도 새겨보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폼페이오의 말을 통해 드러났다. 즉 폼페이오는 트럼프 대통령의 싱가포르 회담 결렬을 전하면서 “지난 며칠 동안 노력했지만 평양으로부터 그 어떤 긍정적 답변도 듣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과연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동안 두 차례의 평양 방문을 통해 폼페이오는 김정은 위원장 내지 김영철 통일전선부장과 비핵화와 관련한 몇 가지 중대 약속을 했는데 최근 그 답변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근데 북한 당국은 대답 대신 펜스 부통령을 가리켜 ‘아둔한 얼뜨기’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워싱턴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중국의 역할도 신중히 고려해야 할 요소다. 미국은 김정은이 중국 다롄(大連)에서 시진핑 주석을 만난 뒤에 북한 태도가 강경으로 돌변했음을 주시하며 이번 사태의 배경에 중국이 도사리고 있다고 의심한다. 중국으로선 북핵 문제의 근본원인을 강조하며 미국이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시킬 것을 주문하면서 한반도에서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확대 행사하려 한다. 북한의 비핵화라는 전략적 목표는 공유하지만 방법론에서 미국과 입장 차이가 큰 현실에서 미·중 간의 갈등이 더 고조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그동안 시 주석과의 2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든든한 원군을 다시 찾았다는 성취감과 남북정상회담으로 한국 정부를 어느 정도 미국으로부터 유리시킬 수 있게 됐다는 정치적 수확을 거뒀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착각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착각은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아랫사람들의 서투른 ‘말폭탄’에 트럼프의 회담 결렬선언이 가져다준 교훈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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