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을 가다
[쉼표]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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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전경. 건축물들은 화려하지 않고 검소한 기풍이 묻어난다. 건물 대부분이 아담한 크기다. 퇴계 선생의 소박한 품격과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도산서원 전경. 건축물들은 화려하지 않고 검소한 기풍이 묻어난다. 건물 대부분이 아담한 크기다. 퇴계 선생의 소박한 품격과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건축물마다 검소한 기풍 눈길
퇴계 품격·선비정신 서려 있어
입구 길목엔 공자 후손 기념비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낙동강 상류가 유유히 흐르는 안동호가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영지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아늑한 골짜기엔 우리 정신문화의 성지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옛날 유학자들이 낙동강물을 내려다보며 시상을 떠올렸을 법한 그 자리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선비인 퇴계 이황 선생의 흔적이 서린 곳이다. 퇴계 선생은 1561년(명종 16) 도산서당을 건립해 후학들을 가르쳤다. 퇴계 사후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이 도산서원이다.

4월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기자가 찾은 도산서원은 완연한 봄기운 속에 고즈넉한 풍광을 드러냈다. 낙동강으로 고개를 돌리니 섬처럼 불룩 솟아있는 시사단(試士壇)이 눈이 들어왔다. 정조 임금 때 지방 인재를 뽑기 위한 시험인 ‘도산별과’를 보던 장소를 기리기 위한 곳이다. 시사단에서 도산서원 쪽을 바라보면 천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도산서원 풍경화인 ‘계상정거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산서당.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도산서당.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도산서당,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

도산서원의 건축물들은 화려하지 않고 검소한 기풍이 묻어난다. 건물 대부분이 아담한 크기다. 퇴계 선생의 소박한 품격과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정문을 지나 오른쪽에 보이는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낙향 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건물로 도산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4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퇴계 선생은 이 집이 너무 크게 지어졌다며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선서당 내부 방 왼쪽 편에 있는 다락방. 이곳은 퇴계 선생이 자기만의 사색에 잠겼던 공간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도선서당 내부 방 왼쪽 편에 있는 다락방. 이곳은 퇴계 선생이 자기만의 사색에 잠겼던 공간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도산서당엔 특이한 공간이 있다. 서당 내부 방 왼쪽 편에 만들어진 작은 다락방이 그것이다. 박명자 도산서원 해설사는 “이곳은 퇴계 선생이 자기만의 사색에 잠겼던 공간으로, 혼자서 명상을 할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당에 군불을 지피는 아궁이 쪽에도 골방이 하나 있다. 다리를 뻗어서 눕기 어려울 정도로 작다. 박 해설사는 “옛날에 스님이 서당에 군불을 지피고, 기도하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도산서당 반대편엔 학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가 있다. 이곳으로 통하는 입구의 문지방은 고양이가 통과할 만큼의 높이로 떠 있어 눈길을 끈다. 박 해설사는 “문지방 밑의 공간은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고 굽히고 들어오라는 의미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농운정사 바로 뒤로는 시설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노비들이 기거하던 하고직사(下庫直舍)가 있다. 

도산서원의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돼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이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뤄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 내 유물·유품 박물관인 옥진각 내부를 설명하는 박명자 해설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도산서원 내 유물·유품 박물관인 옥진각 내부를 설명하는 박명자 해설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퇴계 선생의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玉振閣)은 1970년 성역화 작업으로 완공됐다. 퇴계 선생이 생전에 쓰던 베개와 자리를 비롯해 매화 벼루, 옥서진, 서궤 등 많은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별자리를 그린 혼천의(渾天儀)는 흥미로운 유물 중 하나다. 유학자였던 퇴계 선생이 천문학에도 관심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박 해설사는 “중국이나 한국에 남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혼천의”라고 소개하면서, “퇴계 선생이 유학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천문학까지 하셨다는 것은 몰랐었다”고 했다. 

퇴계 혼천의.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퇴계 혼천의.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매표소에서 도선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엔 1981년 중국 공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 사당에 참배한 후 소감을 쓴 글이 새겨진 ‘추로지향(鄒魯之鄕)기념비’가 있다. 퇴계 선생을 중심으로 선비 정신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도산서원은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됐다.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 증축 사업이 진행됐으며 우리나라 유학 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됐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른다.

 

퇴계종택. 종택은 1907년 일제의 방화로 소실됐다가, 1929년 재건됐다. 퇴계 선생의 불천위 신위를 비롯해 4대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퇴계종택. 종택은 1907년 일제의 방화로 소실됐다가, 1929년 재건됐다. 퇴계 선생의 불천위 신위를 비롯해 4대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퇴계종택 지키는 16대 종손… 1년에 붓글씨 2~3만장 써서 선물로

도산서원에서 차량으로 10여분 거리 떨어진 도산면 백운로에 있는 진성이씨 퇴계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됐다. 이곳은 퇴계 선생의 16대손인 이근필(86)씨가 지키고 있다. 이씨는 1958년 경북대학교 교육학과를 나와 온혜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퇴직한 뒤에는 2002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설립이사, 2005년 도산서원 허시회 설립이사, 2007년 도산서원 거경대학 설립이사를 맡으며 선비문화 전파에 앞장서왔다.

종택은 1907년 일제의 방화로 소실됐다가, 1929년 하정공 이충호에 의해 현 위치에 재건됐다. 퇴계 선생의 불천위 신위를 비롯해 4대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종택은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수련생들이 거쳐 가는 필수코스이기도 하다. 서원호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기획홍보실장은 “수련생들이 이곳에 가면 종손 어른은 무릎을 꿇고 대화를 하시는데, 자기 문중 얘기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중 이야기를 하면 자랑이 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퇴계 선생에 대해선 일절 얘기하지 않는 대신 안동 지역의 다른 문중 이야기나, 귀감이 되는 이야기를 청중의 연령대에 맞춰서 들려준다고 한다. 또한 이씨는 종택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손수 기록한 붓글씨를 기념품으로 선물한다. 서 실장은 “종손 어른이 직접 1년에 2~3만장을 쓴다”고 귀띔했다. 복사해서 나눠주는 것은 정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종손 어른의 지론이다. 서 실장은 “오는 손님들에게 다 드리기 위해 시간만 나면 집에서 붓글씨를 쓰시는데, 열정이 대단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선비 정신 계승의 요람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선생의 선비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08년부터 조성돼 2011년, 2016년을 거쳐 1원사와 2원사로 확장됐다. 주로 직장인, 학생들에게 배려와 겸손을 기본으로 하는 선비정신을 전수하는 것이 주요 프로그램이다. 수련생이 도산서원 방문으로 시작해 시사단 방문을 거쳐 수련원에서 선비정신 강의를 들은 뒤 종택에서 종손과의 대화를 하는 것으로 전체 일정이 짜여졌다. 

이육사문학관에 전시된 이육사 흉상.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이육사문학관에 전시된 이육사 흉상.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4

◆저항시인 이육사의 생애를 한눈에… 이육사문학관

종택 근처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은 퇴계 선생의 14대손으로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생애를 더듬어볼 수 있는 곳이다. 그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후 중국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했다가 1927년 귀국한 뒤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민족적 양심을 지키며 일제에 항거한 이육사 시인은 ‘청포도’ ‘광야’ ‘절정’ 등의 대표시를 남겼다. 

퇴계 선생이 선비 정신의 표상이라면, 이육사는 그 선비의 지조를 이어받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인물로 볼 수 있다. 이위발 사무국장은 “이육사가 어렸을 때부터 주입받은 선비 정신의 핵심은 지조와 지행일치라고 할 수 있다”며 “그것의 그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친일 인사들이 이육사에게 회유를 시도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며 “그것도 선비의 지조와 같은 행동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육사문학관은 지난 2004년 7월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로 개관했다. 이어 2015년 4월부터 증축 공사를 거쳐 2017년 3개 동으로 재개관했다. 문학정신관엔 전시실, 영상실, 북카페, 다목적홀, 강의실 등이 있고, 문학생활관은 사무실, 객실 20개, 세미나실, 식당 등을 갖췄다. 문학살롱엔 육우당 생가 체험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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