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출처: 뉴시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출처: 뉴시스)

베이징 정치 명문가에서 출생

7년 토굴서 하방신분 빈민 삶

상하이 서기직 발탁돼 스타로

보시라이 사건 기초 부패척결

 

전인대, 종신 국가주석 표결

기대했던 전세계 실망감 표출

중국 지식인유학생들도 반발

“독재자 탄생, 마오시대 회귀”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시진핑(Xi Jinping, 習近平, 65) 중국 국가주석의 종신집권이 이론적으로 가능해졌다. 1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 문구 삽입과 국가주석직 2연임 초과 금지 조항 삭제를 담은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통과의례에 불과했던 이번 전인대 표결을 통해 시진핑 주석은 ‘덩샤오핑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집단지도체제를 깨뜨리고 장기집권의 길을 열면서 중국의 국부 마오쩌둥과 개혁개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덩샤오핑 이후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절대 권력자로 등극한 시진핑의 어제 오늘과 국제사회의 우려를 정리했다.

◆‘베이징 아이’ 슈퍼 금수저에서 흙수저로

1953년생 시진핑(Xi Jinping, 習近平, 65)의 이름은 베이징의 옛 이름 ‘베이핑(北平)’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다.

중국인에게 황제가 거했던 베이징에서 태어났다는 건 권력과 재력을 가졌다는 의미다. 현재도 톈안먼(天安門) 광장 주변의 고(古) 주택은 시가 10~20억원대로 중국에서도 재력과 권력의 상징으로 통한다.

시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 개국 원로 정치인으로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촉망받던 혁명가였다. 시중쉰은 13세 때부터 중국 혁명에 뛰어들어 22세 때에는 마오쩌둥의 대장정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최후의 근거지를 제공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시진핑 나이 9세 되던 1962년 시중쉰이 ‘류즈단 사건’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시중쉰이 모셨던 옛 상사 류즈단의 삶을 소설로 묶는 과정에서 한때 반역죄로 몰렸던 가오캉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소설에 등장했고,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시중쉰은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마오쩌둥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태자당으로서의 온갖 특권을 누리던 시중쉰 일가는 하루아침에 반당 세력으로 몰려 몰락한다.

공산당 개국 원로 정치인으로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촉망받던 혁명가였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부자(왼쪽). 1962년 시중쉰은 류즈단 사건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에 복권됐다. 1968년부터 시진핑이 박해를 피해 하방생활을 하며 보냈던 산시(陝西)성 옌촨현 량자허(梁家河)촌의 세 평 남짓한 토굴. 시진핑은 이곳에서 7년을 보내며 정치적 자질을 키웠다.
공산당 개국 원로 정치인으로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촉망받던 혁명가였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부자(왼쪽). 1962년 시중쉰은 류즈단 사건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에 복권됐다. 1968년부터 시진핑이 박해를 피해 하방생활을 하며 보냈던 산시(陝西)성 옌촨현 량자허(梁家河)촌의 세 평 남짓한 토굴. 시진핑은 이곳에서 7년을 보내며 정치적 자질을 키웠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시 부자의 삶은 더 어려워진다. 시진핑은 홍위병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15살 되던 1968년부터 7년간 ‘하방(下放)’을 택한다. 하방은 지식인의 사상개조를 위해 농촌으로 보낸다는 뜻이지만 어린 시진핑의 생활은 강제 노역자와 다름없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중‧고등학생 시절을 산시(陝西)성 옌촨현 량자허(梁家河)촌의 세 평 남짓한 토굴에서 살면서 하루에 50㎏씩 밀을 나르며 십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무려 7년을 보냈다.

시진핑의 하방시절은 시진핑이 중국 최하층민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을 뿐 아니라 국민적 사랑을 받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는 기간이 됐다. 시진핑 스스로 “나는 황토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하방 생활이 자신을 키웠다고 평했다. 최고 권력자로 자리잡은 뒤 2015년 어릴 때 살았던 토굴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권력 암투가 가져다 준 ‘국가주석’ 자리

아버지의 정치적 몰락으로 태자당 출신이면서도 10번이나 입당을 거절당했던 시진핑은 1974년 마침내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그를 눈여겨본 량자허현 서기의 추천으로 가능했다. 그리고 1975년 중국 최고 명문대인 칭화대학에 입학한다. 1978년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아버지 시중쉰도 정치적으로 복권돼 16년 만에 시진핑 앞날에도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지방근무를 자청한 시진핑은 푸젠성, 허베이성, 저장성 등 중국 전역을 돌았다. 그는 지방 경험을 통해 중앙 무대에서 정치엘리트 계파들과 대항할 수 있는 측근들을 만드는 기회를 잡았다.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인기가 높은 퍼스트레이디이자 ‘정치적 동반자’ 펑리위안과의 만남도 이때 이뤄진다. 당시 이혼남이었던 시진핑은 1987년 국민가수 펑리위안과 결혼했다.

칭화대 졸업 후 지방관리로 일하던 때의 시진핑 모습.
칭화대 졸업 후 지방관리로 일하던 때의 시진핑 모습.

때를 기다리던 시진핑에게 2007년 기회가 찾아왔다.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리던 천량위가 비리로 상하이 서기직에서 낙마하자 그가 후임으로 발탁된 것이다. 중국 경제도시 상하이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그는 단박에 스타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10개월 뒤에는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임명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됐다.

당시 시진핑이 속한 태자당 세력은 전 국가주석인 장쩌민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당시 국가주석인 후진타오가 이끄는 공청단에 비해 상대적인 파워가 적어 시진핑이 국가주석에 오를 것이라 전망한 사람은 없었다. 뜻밖의 행운은 암투가 가져다 줬다. 상하이방과 공청단이 후계자를 자리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암투 끝에 두 세력에 속하지 않으면서 적이 없었던 시진핑을 국가주석 후계자로 삼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는 2008년 부주석에 오르며 국가주석 자리를 예약했다.

◆‘부패척결’ 호랑이든 파리든 때려잡는다

시 주석이 5년 만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 데는 시대적 배경과 운이 따랐다. 시진핑 정권 출범을 전후해 아랍의 봄, 오렌지혁명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부패한 독재자들의 몰락을 목도했다. 부패척결이 요구됐고, 시 주석이 권좌에 오르기 한 해 전인 2011년 때마침 ‘보시라이 사건’이 터졌다.

보시라이 당시 충칭시 서기는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에 속했지만 최대 정적이었다. 2011년 말 보시라이 아내의 사주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가 독살당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듬해 사건에 연루돼 신변의 위협을 느낀 보시라이의 최측근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도망가는 일이 생겼다. 그러자 시진핑은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과 손잡고 이를 구실로 보시라이를 해임하고 사법처리를 주도했다. 보시라이는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된 해인 2013년 진행된 1, 2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몰락했다.

연이어 후진타오 비서실장 출신인 링지화 당 중앙 통일전선부장의 아들이 만취 상태로 최고급 페라리 스포츠카를 몰다가 숨졌다. 차에는 알몸의 여대생 두 명도 타도 있었다. 두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시 주석은 반부패 사정으로 연결했다. ‘호랑이(부패한 권력)든 파리(하급 공무원)든 다 때려잡겠다’는 선언에 여론은 열광했다. 시진핑은 상무위원들은 손대지 않는다는 암묵적 금기도 깨면서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인물’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부패 호랑이’라고 불렸던 후진타오 정권의 공안 실권자 저우융캉, 장쩌민 인맥의 대부인 궈보슝, 취차이허우 군사위 부주석 등을 잘라냈다. 정적의 수족을 잘라내면서 정적이 설 자리를 없애는 식으로 당․정․군 3대 권력 집단을 시 주석의 세력으로 물갈이했다.

◆“내 주석 아냐” 중국인들도 반감 표시

시진핑은 2기 임기가 시작된 지난해부터 장기집권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지난해 10월 19차 당대회에서 시 주석은 ‘2050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라는 장기 목표를 제시하고 “그 같은 난제를 성취하려면 강력하고 일관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후 임기제한을 폐지하는 개헌 건의문이 1월 26일 전인대에 제출됐다. 그리고 지난달 25일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국가주석 임기 제한을 폐지하는 내용의 개헌안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 격)에 제출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주석 임기제한 폐지’를 담은 개헌안은 11일 전인대에서 통과돼 시 주석의 장기집권은 현실로 도래했다.

중국 당국은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지난해부터 철저히 여론을 통제했다. 중국 최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서는 ‘국가주석 임기’ ‘임기’ ‘개헌’ ‘시진핑 장기집권’ ‘시황제’등의 키워드 검색이 차단됐다. 중국 당국의 여론 장악에도 중국 내 학자와 평론가들은 장기집권을 도모한 독재자의 말로를 제시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베이징의 역사학자 장리판(章立凡)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짐바브웨의 독재자 무가베를 예로 들어 시 주석의 장기집권 추진을 비판했다. 장리판은 "이론적으로 그(시 주석)는 무가베보다 더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겠지만,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무가베는 37년간 독재를 이어왔지만, 지난해 11월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중국 해외유학생들도 시 주석에 대한 실망감을 표하고 있다.

미국 외교안보 전문매체 포린폴리시의 지난 7일 보도에 따르면 서구에 있는 중국유학생들 사이에는 ‘내 주석 아니다’라며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캠페인에 나섰다. 지난 1일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학 온라인 게시판에 시 주석 사진 위에 영어로 ‘내 주석 아니다(#NOTMYPRESIDENT)‘와 중국어로 임기제한 폐지 반대가 쓰인 포스터가 등장했다. 이어 컬럼비아대학과 뉴욕대학 등 미국과 캐나다, 호주, 영국 등의 9개 대학에도 같은 포스터가 출현했다.

◆시진핑에 실망한 국제사회…“독재자는 부패첩경”

시진핑 집권 이후 유럽 등은 시진핑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국제사회 수호자의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시진핑이 장기집권으로 또다른 독재자의 탄생을 예고하자 국제사회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장기집권 개헌안이 전인대에 제출됐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한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시 주석의 ‘스트롱맨 룰(독재자의 법칙)’이 적개심과 억압에 대한 새로운 두려움을 야기하고 있다”며 “시 주석의 3연임을 가능토록 한 공산당의 결정에 학계는 물론 법조계, 언론, 재계 모두 분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인 통치로의 복귀’라고 명명하며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젊은 관료들이 승진 등에 한계를 느끼면서 내부적으로 갈등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중미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시 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국제적 업무를 하는 데 있어 중국이 시 주석에게 더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미국을 포함한 나머지 나라들은 자신감에 가득 찬 시 주석을 다뤄야 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시진핑의 절대권력을 옹호하는 중국 내 진영에서는 부패척결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시진핑이 장기집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것은 역사의 철칙이다.

펠드먼 교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시진핑이 장기집권할 경우 중국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독재자의 어두운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경제성장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이 지속될 확률은 떨어진다"면서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의 말로는 좋지 않다”고 뼈있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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