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면서, 도성민의 삶을 지켜온 울타리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도성의 기능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한양도성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발굴과 복원과정을 거치면서 잃었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와 관련, 한양도성 전 구간인 18.6㎞를 직접 걸으며 역사적 가치를 몸소 체험하고자 한다.
▲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인왕산 ⓒ천지일보(뉴스천지)

험준한 바위 위에 성벽 쌓아 올려
‘명소’ 삿갓·기차바위도 볼 수 있어
윤동주 시인 언덕, 문학관도 만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인왕산으로 향했다. 인왕산은 태조, 무학대사의 기도터와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 이름마저 왕(王)자를 쓰지 못하고 ‘인왕(仁旺)’으로 고쳤다가, 1995년에 와서야 ‘인왕(仁王)’이란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국사당과 범바위

인왕산에 오르다 보면 성 돌에 낀 거무스름한 이끼가 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오랜 역사를 대신 말해주는 것이었다.

길을 따라 걸으니 성벽 바깥으로 ‘국사당’이 보였다. 이곳은 신당으로 원래 국사당은 남산 꼭대기에 위치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전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조금 더 길을 걸으면 산 위로 큰 바위들이 보였다. 인왕산은 돌과 바위가 많은 게 특징이다.

▲ 인왕산 성벽 ⓒ천지일보(뉴스천지)

잠시 앉아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도심 속에서 높게만 보였던 빌딩들이 손가락만큼 작아졌다. 도심이 전부인 줄만 알고 살던 삶. 산에 올라와야만 우리 인생이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는 것을 깨닫나 보다.

바위를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설치된 밧줄을 잡고 올라야 안전하게 산악을 할 수 있었다. 길이 좁지만 많은 이들이 인왕산을 찾는 것은 조선시대 한양의 명소 중 한 곳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잠시 후 인왕산 범바위가 모습을 보였다.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서 무악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못 미친 곳에 있던 바위로, 호랑이의 모양을 닮아서 ‘범바위’, 다른 말로는 ‘호암(虎岩)’이라고 했다.

이 범바위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인왕산 중턱에 한 쌍의 호랑이가 있어 무악재를 넘나들었지만, 사람에게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악당이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포효하며 혼쭐을 내주곤 했다.

▲ 인왕산 범바위 ⓒ천지일보(뉴스천지)

어느 날 인왕산에 산불이 나서 동물들이 타죽자, 이 호랑이 부부가 먹을 것을 찾아 사람들 사는 마을로 내려왔다. 이때 강원도에서 온 포수 한 사람이 암컷 호랑이를 쏘아 잡았다. 그러자 암컷을 잃은 수컷은 이리저리 헤매며 슬피 울부짖다가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이때 바위 한쪽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 모양이 죽은 수컷 호랑이처럼 돼 버렸다. 이렇게 해서 범바위가 생긴 것이다. 범바위에 반사된 햇빛은 마치 호랑이 눈에서 나는 광채와 같았는데, 암컷을 쏘아 죽인 포수는 이 빛에 눈이 멀어버렸다고 한다.

◆삿갓바위와 기차바위

범바위를 지나 계단 길을 걸은 후 또 다른 큰 바위산으로 올라가면, 삿갓바위가 등장한다. 인왕산 정상의 삿갓바위는 마치 삿갓을 벗어 놓은듯하다 하여 삿갓바위라 불린다. 이곳에서도 서울 도심이 잘 내려다보였다. 특히 인왕산의 남북쪽 능선을 따라 지어진 도성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경복궁과 청와대가 내려다보여, 땅 위에서만 보던 모습과는 다른 장관을 연출했다.

▲ 인왕산 삿갓바위 ⓒ천지일보(뉴스천지)

삿갓바위를 지나 이제 창의문 쪽으로 길을 걸었다. 산세가 아름다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때마침 기차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마치 기차가 늘어선 듯 보인다고 해서 기차바위라고 불리는 이곳 또한 인왕산의 명소다. 기차바위에 서서 한양도성을 바라보면 험준한 바위 위에 기반을 다지고 성벽을 쌓아 올린 조선시대의 축성기술을 느낄 수 있다.

이제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정상에서 내려와 창의문에 가까워질수록 도성 축조양식이 혼재된 구간을 자주 볼 수 있다.

산에서 내려와 차도를 따라 걸으니, 윤동주 시인 언덕이 나타났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암울한 민족 현실을 극복하려는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누상동에서 하숙했는데,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보고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했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 작품인 ‘서시’를 새긴 커다란 비석이 있으며 윤동주 문학관도 가까이 있었다.

▲ 윤동주 문학관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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