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은 누각과 정자의 합친 말이다.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다락구조로 높게 지어진 누각과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터진 곳에 지어진 정자는 자연 속에서 여러 명이 또는 혼자서 풍류를 즐기며 정신수양을 하던 건축물이다. 옛 선비들은 마음의 여유를 느끼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누정을 찾았다. 이곳에 담긴 선조들의 삶을 알아보자.

 

▲ 효사정에서 바라 본 한강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한강변의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 그 옛날 선비들도 자연이 좋아 찾아왔던 곳.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한강변 언덕에 있는 정자인 ‘효사정(孝思亭)’이다.

효사정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에 내린 후 도보로 금방 갈 수 있다. 한강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으면 나무로 된 계단이 나오고, 잠시 후 정자 하나가 머리를 내민다. 제 모습을 드러낸 효사정은 신비한 숲에 싸여있듯 오묘한 느낌을 줬다.

강바람이 솔솔 불어 앉아있기 좋은 이곳은 한번 와본 이들은 꼭 다시 들를 법 했다. 게다가 수려한 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여, 각박한 도심에서 잠시 숨을 돌리기에는 최고의 장소로 보였다. 도심 속에 고요히 자리한 효사정은 어떤 곳일까.

▲ 효사정 ⓒ천지일보(뉴스천지)

◆효심 담긴 효사정

효사정은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이 지은 정자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지었다.

때때로 이곳에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쓴 아버지를 추모했다고 한다. 이곳 주변의 뛰어난 경치를 활용해 이름 짓기보다는 노한의 효성에 감복해 이를 기리기 위해 효사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제일 좋은 곳으로 칭송됐다. 실제로 이곳에서서 보면 도심 뒤로 북한산, 남산, 응봉산이 멀리 내다보였다. 자연이 더 푸르른 그 옛날에는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노한의 손자인 노사신은 성종 때 중요 관직을 지내고 연산군 때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효사정에서 여러 대신들과 시(時) 모임을 열곤 했다고 한다.

정인지, 신숙주, 김수은, 서거정, 중국사신 채수, 기순 등도 효사정의 정취를 시로 읊었다. 오늘날 효사정에 가면 나무에 새겨진 정인지의 시 한편을 찾을 수 있다.

사정(思亭)이 높이 큰 강 위에 임했는데,
효성스런 아들 착한 손자 갖추어 아름답다.
세덕(世德)은 이미 산같이 무겁고,
가성(家聲)은 길이 물과 함께 흐른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데
개오동나무 늙었고
가을날이 쌀쌀하니 골짜기가 그윽하다.
굽어보고 쳐다보는 정회를
누가 알아주리.
때때로 북궐을 보니
서기 띤 연기가 떴네.

효심을 담은 시 한 수는 효사정이 어떤 곳인지를 다시금 알게 해줬다. 자연을 벗 삼은 선비들의 모습도 눈에 아른거렸다.

▲ 효사정 ⓒ천지일보(뉴스천지)

◆옛터와 가까운 자리에 정자 세워

안타깝게도 옛 효사정은 사라졌다.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흑석동 한강변을 끼고 있는 낮은 산에 신축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그 자리에는 한강신사(일본의 신사로, 웅진신사라고도 부름)가 있었다. 효사정은 관련 기록이 담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러 시문을 참고해 원래 터를 찾았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자리를 택해 정자를 세웠다.

효사정 서쪽으로 한강을 따라 내려가면 정조가 배다리를 건넌 뒤 쉬어가던 ‘용양봉저정’이 있다. 한강변 낮은 언덕 위에는 500년 이상 된 사육신묘가 있다. 이곳 효사정에서 바라보니 한강을 따라 역사적 장소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한강과 함께하는 역사는 영원한 듯했다.

▲ 효사정에서 바라 본 한강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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