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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동아시아 관광] ②일하러 온 중국 사신… 한강·금강산 경치에 심취하다
장수경 기자  |  jsk21@newscj.com
2016.12.22 08: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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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등장한 근대적 형태의 관광여행. 동아시아의 3국, 즉 한중, 한일, 중일 간에는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역사적 접촉과 상호 간의 이동이 있었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시작된 건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3국간의 근대적 관광여행이 시작된 후 지난 120~130여 년간 여행 형태, 여행 목적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와 관련, 한국 사회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 관광 여행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천지일보(뉴스천지)

中, 사적유람보단 업무상 방문
조선, 사신 위한 접대 숙소 마련

일 마친 후 성균관·금강산 유람
장거리 유람 요청에 조정 난감

근대전환기, 여행 열정 뜨거워
‘중일주유표’ 구입 후 한국 방문

서울아시안게임·88올림픽 이후
한국 방문 중국인 계속 늘어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한국을 찾는 중국인이 상당하다. 서울 명동, 남대문시장 등에 방문하면 중국인이 한국인보다 더 많을 정도다.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가게도 많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중국인의 한국관광이 시작됐을까.

◆조선시대 중국인의 한국 유관

19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 관광의 상호시선’에 실린 ‘중국인의 한국 관광과 한국 사회의 변화’ 자료에 따르면 과거 비용을 들여서 관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상류층에 국한됐다. 산업혁명 이후 부유한 평민이 등장하고, 이들을 포함한 상류층이 단체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관광기업이 등장했다. 이후 중산층 서민을 포함해 폭넓은 계층의 관광이 늘어났다.

한국과 중국은 오랜 세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양국 사이에는 많은 인적 교류가 있었다. 양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쉽게 월경이 가능했다. 왕래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됐던 전통 시대에는 사적인 유람보단, 업무상 방문이 훨씬 많았다. 사신이나 상인의 왕래가 잦았던 것.

이에 조선은 공적 목적으로 방문하는 외국인 접대를 위한 숙소를 건립했다.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성으로 옮긴 후 ‘태평관(太平館)’을 신축했다.

태평관은 명나라 사신 접대와 숙박을 위한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사신이 가지고 온 중국의 물품을 조선 상인과 거래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조선 상인이 물건을 팔기도 했다. 당시 거래됐던 물목은 각종 옷감과 향료, 인삼, 그릇 등 다양했다.

‘동평관(東平館)’도 있었다. 이곳은 왜인과 유구 등 동남아 여러 나라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장소였다. 동평관은 왜인의 숙소로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점차 행정 일반에 이르는 업무도 담당했다. 공물을 무역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조선 태조 대에서 인조 대까지 240여년 동안 약 228회 명나라 사신이 다녀갔는데, 이 중 서울에 와서 유관한 것은 총 138회에 이른다.

한양에서 사신들은 문묘와 성균관에도 많이 들렀지만, 가장 많이 유관했던 곳은 한강이다. 서울 외 지역 중에서 중국 사신이 가장 많이 유람하기 원했던 곳은 금강산이었다. 태종~연산군 대에 금강산 유람 요청이 꾸준히 있었고, 총 8회에 걸쳐 17명의 사신이 금강산 유람을 다녀갔다. 먼 거리를 사신이 다녀올 경우 많은 어려움이 발생하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근대 전환기 중국인의 한국 관광

근대 전환기에는 어땠을까. 이 기간은 중국의 경우 청 말에서 중화민국 시기까지, 한국의 경우 조선 말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다.

이 당시 교통수단의 근대적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철도였다. 중국에서는 1876년 영국 자본에 의해 오송철로가 개통됐다. 1934년에는 14개 노선, 총 1만 6000㎞의 철로가 부설됐다. 중일주유표(中日週遊票)를 구입하면, 중화국유철로, 남만철도, 한국을 경유하는 일본철도와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연락선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중반, 중국은 해외여행을 위한 인프라를 어느 정도 갖췄지만, 해외여행에는 막대한 비용, 언어 소통의 어려움 등의 난관이 따랐다. 하지만 당시 중국 지식인의 여행에 대한 열정은 매우 뜨거웠다. 많은 여행 경험과 견문이 사회 지도층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으로 인식됐기 때문. 이에 1880년대에 40만명에 이르던 중국인 출입국 유동인구는 1910~1920년대에 200만~300만명으로 증가했다.

◆현대 중국인의 한국 관광

하지만 중국에서 해외관광의 발전은 아주 천천히 이뤄졌다. 공무여행이 주를 이뤘던 중국인의 해외방문은 1983년 11월 광둥성에서 홍콩으로 친척 방문을 위한 관광단이 출발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1990년대에는 인근의 동남아시아 지역이 국외관광 목적지로 개방됐다. 중국인이 한국을 알게 된 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문이었다. 이후 친지방문의 형태로 한국을 방문하는 조선족이 생겨났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은 정식으로 수교했고, 1998년 중국 정부는 한국을 전 세계 국가 중 7번째로 국외 관광 목적지로 지정했다. 이후 점차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늘어났다. 2014년에는 551만 4000여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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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1)
캐린
2016-12-24 12:41:10
찬성:0 | 반대:0 찬성하기 반대하기 삭제하기 신고하기
옛날부터 중국과 일본은 근접해 있기
옛날부터 중국과 일본은 근접해 있기 때문에 뗄래야 뗄수가 없죠
전체기사의견 보러가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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