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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동아시아 관광] ①160년 전 ‘경주 유적’… 왜 국내 관광지됐나
장수경 기자  |  jsk21@newscj.com
2016.12.18 1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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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등장한 근대적 형태의 관광여행. 동아시아의 3국, 즉 한중, 한일, 중일 간에는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역사적 접촉과 상호 간의 이동이 있었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시작된 건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3국간의 근대적 관광여행이 시작된 후 지난 120~130여 년간 여행 형태, 여행 목적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와 관련, 한국 사회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 관광 여행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첨성대의 모습, 1914년경 촬영 추정 (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천지일보(뉴스천지)

도시·문화·자연 경관, 관광지로 급부상
교통수단 발달, 전화 등 매스컴 영향

우편국 배달원, 석굴암 본 후 상사에 보고
부통감이 석굴암 방문해 사진 찍어 유포

그림엽서 제작해 천년고도 경주 소개
1921년 가을 신라 돌무지무덤도 발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천년 고도를 자랑하던 신라. 이곳의 사찰과 탑, 고분은 국내외에서 한국 관광의 정수로 여겨져 왔다. 신라 경주는 언제부터 관광객의 발길이 오가는 여행지가 됐을까.

◆관광 이미지 보급, 사진 인쇄미디어 발달

14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동아시아 관광의 상호시선’의 배형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경주와 같은 도시와 문화·자연 경관이 관광 목적지가 되기 시작했던 시점은 160년 전이다. 이 당시 대양과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이 대중화됐다. 교통수단(증기선, 철도, 전차)의 발명과 금융서비스 발달, 전보·전화와 같은 즉각적인 매스컴이 연결됐기 때문.

당시 지역 관광업자뿐 아니라 관련된 대형 공기업, 사기업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식민지 주요 도시와 항구, 기차역 등을 거쳐 가는 수많은 여행객이 인근에 위치한 관광지를 방문하도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다른 두 가지의 기술혁신, 즉 사진과 값싼 인쇄기는 여행 정보 제공에 힘을 불어넣었다. 당시 제작된 작은 안내책자, 기념 사진첩, 그림엽서 등이 제작·대량 유통돼 일반 소비자가 멀리서도 여행지를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석굴암 사진, 1911~1913년경 촬영 추정(경주 도요켄 사진관 출판, 현 교토대학교 고고학 연구실 소장)(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일본, 1900년 석굴암 재발견

특히 일본은 경주에 관심을 가졌다. 경주의 근대적 유적관광의 탄생은 19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당시 토함산 깊숙한 골짜기에서 석굴암이 ‘재발견’돼 조선통감부가 관심을 갖게 됐다.

구술에 따르면 1908~1909년 사이에 우편국 배달원이 우편물을 배달하는 길에 석굴암을 발견하고 경주에 돌아와서 상사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후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부통감이 1909년 4월 26일에 석굴암을 방문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어 이를 많이 유포했다. 이후 1910년 8월에는 ‘신라회’가 결성됐다. 1921년 가을에는 ‘금관총(신라 때만 있었던 돌무지무덤)’이 발견되기도 했다.

   
▲ 18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경주 읍내 지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경주 유적의 의미

특히 일본은 그림엽서를 제작해 천년고도 경주를 소개했다. 사찰과 불탑, 매장된 보물과 관련 내용은 학자, 학생, 골동품 수집가뿐 아니라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의 정서를 자극했다.

그렇다면 일본인이 경주에 주목한 이유는 뭘까. 첫째, 경주의 예술적 고고학적 유적들은 대부분 평야와 하천 부근 그리고 계곡에 집중돼 있고, 다섯 개의 산에 둘러싸여 있다. 그 산들은 과거 천년이상 자연적 방어 역할을 맡아 왔다.

둘째, 역사적으로 936년에 신라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신라왕족의 후손이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이는 다른 삼국시대 국가의 수도였다가 새로운 통치자에 의해 버림을 당한 국내성(현 중국 길림성 집안)이나, 공주·부여·개성 등의 지역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신라 미술과 건축적 구조물의 재료인 화강암의 역할도 컸다. 목재와 같은 손상하기 쉬운 재료와는 달리 화강암은 화재·전쟁·약탈 등의 파괴적 힘을 견뎌냈다. 비·홍수·곰팡이·벌레 등의 자연적인 피해도 견뎠다. 그리고 유물은 온전한 모습으로 1900년대에 재발견됐다.

또 중요한 점은 신라 고분과 부장품, 특히 토기나 기와는 층위학적(오랜 시간 축적된 지층 연구)으로 발굴됐다는 점이다. 신라의 예술품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무덤 부장품의 연대 측정의 가장 정확한 징표였던 것.

당시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도쿄와 교토의 제국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고고학자와 기술진은 정기적으로 일본과 경주를 왕복하게 됐다. 경주 고분 유물의 연구는 전쟁 전의 일본 고분 고고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 조선 여행 중 수리된 석굴암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황족 간인노미야와 부인, 그리고 수행자들 (1935년 10월 1일 방문)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에 담긴 경주 유적

19~20세기로 넘어갈 시기에 사진기는 일본의 사진기술자, 측량사, 학자에게 꼭 필요한 도구였다. 사진기는 경주의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 등급을 지정하고, 측량과 기록의 수단이 됐다. 20세기에 다양한 매체기관의 사진이 많이 유포됐다.

1920년대가 되면서 경주 유적지의 사진은 조선총독부의 조선통치의 성과를 나타내는 사진첩, 조선총독부철도국에서 발행된 지도나 소책자 등 다양한 식민지 매체를 통해 유포됐다. 자동차 여행을 위한 추천 관광지를 제시한 컬러 조감도가 첨부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신라 경주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됐다. 

19세기 말부터 등장한 근대적 형태의 관광여행. 동아시아의 3국, 즉 한중, 한일, 중일 간에는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역사적 접촉과 상호 간의 이동이 있었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시작된 건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3국간의 근대적 관광여행이 시작된 후 지난 120~130여 년간 여행 형태, 여행 목적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와 관련, 한국 사회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 관광 여행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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