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용직)이 ‘1876년 개항, 대륙에서 해양으로’ 특별전에 전시된 수신사 삽화가 실린 신문. ⓒ천지일보(뉴스천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특별전
해안 측량 허용, 일본 왕래 통상 허가
춘향과 이몽룡 사랑이야기 각색되기도

시찰단 파견해 세계 변화 읽으려 노력
기업가, 선교사 등 외국인 활발한 활동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1892년 고전소설 ‘춘향전’이 프랑스에서 각색돼 발행됐다. 당시 프랑스 소설가 ‘로니’는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洪鍾宇)의 도움을 받아 춘향전을 번역했다. 감미롭게 묘사된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는 아시아 문학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가지는 이국적인 감성을 자극했다.

이 책의 삽화에는 춘향과 이몽룡의 모습이 서양인으로 묘사돼 있다. 로니의 번역본은 1999년 프랑스에서 다시 출간됐다.

이처럼 1876년 조선의 개항은 한국의 문학을 세계로 알리는 때였다. 그러는 동시에 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두 개의 인식이 공존하던 조선의 개항기. 시대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을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용직)이 ‘1876년 개항, 대륙에서 해양으로’ 특별전에 전시된 조일수호조규(위)와 반대 상소(아래). ⓒ천지일보(뉴스천지)

◆근대적 외교관계 시작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폐쇄적인 대외정책에 변화가 왔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무력시위를 하면서 개항을 요구했다. 청은 조선에 일본과의 수교를 권했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는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조약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조선에겐 불평등조약이었다. 부산 외 두 곳 개항 허용 및 일본인의 왕래 통상 허가, 조선의 해안 측량 허용, 영사재판권 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던 것.

1880년대 들어서는 다른 나라와도 조약이 체결됐다. 서양 국가 중 최초로 조약을 맺은 곳은 미국이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임오군란 진압에 도움을 준 청나라와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 이 서양제국들과의 조약 체결 과정에서 청나라는 지속적으로 개입했다. 조선이 독립적인 외교적 지위를 갖는 것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해외로 나간 조선인, 조선에 온 외국인

조선인이 해외로, 외국인이 조선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해외 각국에 시찰단을 파견해 세계 변화를 이해하고자 했다. 일본에 수신사(1876~1882년 동안 3차 파견), 청나라에 영선사(1881년), 미국에 보빙사(1883년)가 파견됐다. 당시 시찰단의 모습은 영국, 미국의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해외에 시찰단으로 다녀온 인물들은 대개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하는 개화 세력에 합류했다.

각국과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후 외국인들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의 외교관이 조선에 파견됐고, 독일인 묄렌도르프, 미국인 오웬 데니 등과 같은 인물은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업가, 선교사 등도 조선에 들어와 개항장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동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용직)이 ‘1876년 개항, 대륙에서 해양으로’ 특별전에 전시된 일제강점기 부산항 전경. 부산박물관 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개항장, 개화의 관문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가장 먼저 개방한 지역은 어딜까. 바로 왜관이 소재했던 부산이다. 이어서 원산, 인천 등도 개방됐다. 이 공간에서 외국 배의 정박, 외국인의 거주, 무역활동 등이 허용됐다. 청나라와 일본 등은 개항장 내에서 단독 거류지를 설정하기도 했다. 개항장 내에는 각국의 영사관이 있어 자국민의 권익을 보호해줬다.

개항장 내에는 여러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활동했다. 각 나라별로 다른 양식의 건물이 지어지고 서양 상품이 유통되는 등 이국적 풍경과 문물이 보이는 특별한 장소로 발달했다. 개항장에서 시작된 신문물 도입은 다른 지역으로도 흘러갔다. 이는 조선 전체의 개화, 근대화를 촉발시키는 시발점 역할을 했다.

▲ 개항 후 사용된 인력거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신문물 도입과 조선의 근대화

개항이 일으킨 변화는 조선 전역으로 퍼졌다. 조선의 수도 한성의 중앙부에는 전차가 다녔고, 인천과 한성을 잇는 기차가 부설됐다. 전기가 도입되는 등 각종 신문물이 도입됐다. 도시 경관이 변하고 사람들의 생활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개항 후 조선은 국가적으로도 큰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었던 때였다. 이와 함께 사람들의 생활도 격변의 상황 속에 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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