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의 선진화·세계화를 위해선 ‘법고창신’의 정신을 가지고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상생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전통문화는 서양문화에 비교하면 입지가 좁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도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살아 있는 문화재들이 있다. 바로 형태로 헤아릴 수 없는 문화적인 소산인 무형문화재들이다. 무형문화재는 물질적으로 정지시켜 보존할 수 없는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기타 등 문화재 전반을 말한다. 형태가 없는 기능 또는 예능이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이를 보유한 사람을 대상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들이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유는 무엇이며, 현대문화와 어떻게 상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인터뷰를 통해 들어본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송순섭 (제공: 송순섭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송순섭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2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판소리를 시작했다. 취직을 못 해 광주를 떠돌다가 호남국악원에서 들리는 우리 가락을 홀린 듯 듣고 서성였다.

“소리를 좋아하면 들어와라”는 공대일(1911-1990) 선생의 부름에 국악원에 들어간 게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 송순섭 선생 소리꾼 인생의 시작이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어. 학교에서 음악과 연극을 잘했지. 국악원에 들어가서 북치고 소리를 했는데 그걸 선생님이 보시고는 배워보라고 하셨어. 그렇게 판 소리를 하게 됐어.”

처음부터 소리를 잘했던 것은 아니다. 밖에선 소리가 안 좋다는 혹평을 들었고, 집안에선 집안을 망친 놈이라는 말을 들었다. 송 선생은 계속되는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도전했다. 박봉술(1922-1989) 선생에게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를, 김연수(1907-1974) 선생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나는 판소리 적벽가 문화재지만 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선혈을 위해 역사적인 인물로 창극을 만들었어.”

그는 국악협회를 일으켜 ‘유관순전’ ‘동래부사 송상현’ ‘성자 이차돈’ 등 여러 창극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또 55세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흥보가’ ‘적벽가’ 등의 사설을 바로잡은 창본집을 발간했고, 58세에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송 선생은 운산판소리연구원을 세워 제자 양육에 힘썼으며, 한국전통예술진흥회 광주지부장, 서울대학교 국악과 강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군 국악은 설 자리가 없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도 국악 전용 무대가 없다.

송 선생은 “외국에 가서 외국 음악을 배워 최고로 치면서, 우리나라의 음악은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며 “학교에서 국악을 잘못 가르쳐도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모른다. 전문 기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마음이 너무 아파. 나라가 바로 서려면 문화가 중요해. 남의 것만 쓰지 말고 우리 것을 먼저 바로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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