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여진의 선조는 말갈(靺鞨)에서 나왔다고 한다. 말갈은 물길(勿吉)이라고도 했다. 물길은 옛 숙신(肅愼) 땅이다. 동한시대에는 읍루(挹婁) 또는 읍루(悒婁)라고 불렀다. 북위시대에 물길은 속말부(粟末部), 백돌부(伯咄部), 안거골부(安車骨部), 불열부(拂涅部), 호실부(號室部), 흑수부(黑水部), 백산부(白山部) 등의 7개 부족이 있었다. 수대(隋代)에는 이 7개 부족을 모두 말갈이라 불렀다. 당대(唐代) 초기에는 흑수말갈과 속말말갈만 남고 나머지 5개 부족은 사라졌다. 속말말갈의 시조는 원래 고구려에 부속됐던 대씨(大氏)였다. 당(唐)이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속말말갈은 동모산(東牟山) 일대를 차지했다. 나중에 발해를 세우고 10여 세대를 잇는 동안 문자(文字), 예악(禮樂), 관부(官府), 제도(制度)를 정하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거느린 대국으로 성장했다.

흑수말갈은 고구려와 연접한 숙신땅에 살았다. 15만 병사로 고구려를 도와 당태종과 대적했지만 안시성(安市城)에서 패했다. 당의 현종(玄宗)시대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추장을 도독, 자사로 임명했으며 장사(長史)를 설치해 감독했다. 나중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당과의 국교를 오대시대에 거란이 발해를 점령하자 흑수말갈은 다시 거란에 복속됐다. 거란의 영토에 사는 흑수말갈을 숙여직(熟女直), 거란의 영토에서 벗어난 북쪽의 거주자들을 생여직(生女直)이라 불렀다. 생여직 땅에 혼동강(混同江), 장백산(長白山)이 있었다. 혼돈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부른다. 백산과 흑수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여진의 기원에 대해서는 단일기원설과 복합기원설로 양분된다. 부사년(傅斯年)은 ‘금사’와 ‘송막기문(松漠記聞)’을 토대로 여진은 숙신의 한 갈래인 말갈이며 예맥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도엽군산(稻葉君山)은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이 결합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조진적(趙振績)도 단일기원설에 반대하며 여진은 오고부(烏古部), 고구려 유민, 흑수말갈이 융합된 민족이라고 했다. 김위현(金渭顯)도 ‘요금사연구’에서 이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특히 12세기 초에 갑자기 강자로 등장한 여진의 핵심인 완안부(完顔部)는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 주축으로 동북 지역의 여러 민족을 통합하고 여진이라는 새로운 부족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 여진이 이 지역의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고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형성한 것과 유사하다.

12세기 초 등장한 여진족은 역사상 보기 드문 성장속도를 보였다. 불과 12년 동안에 동북의 여진을 통일하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 요를 멸망시켰으며, 중원의 송을 압박해 휘종과 흠종 부자를 생포했다. 중원왕조는 이 사건을 ‘정강의 치’라고 부른다. 반독립국 상태였던 이들이 동북지방을 석권하고 중원의 회수(淮水) 이북을 차지한 역량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고도의 통치력이 그 배경에 있었지만, 불길처럼 일어나 순식간에 발전하는 범몽골계 유목민족의 기질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후대에 같은 북방계 민족으로 중원을 지배했던 몽고족와 만주족도 이들의 사례를 충분히 흡수했다.

여진이라는 명칭은 ‘요사’에 처음 등장한다. 요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요동에 살던 여진부를 공략하고 300호를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이다. 여진의 만주어 발음은 주션(Jusen)으로 조선의 우리말 발음과 유사하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쿠데타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명에 국호를 정해달라고 제시한 화령(和寧)과 조선은 그가 여진족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 영흥의 옛 이름이고, 조선은 고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라고 하지만 선조가 여진의 땅에서 살았던 그로서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금과 청이라는 강국을 세운 여진을 이민족으로 취급한 전통적 역사관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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