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성 전 명지전문대 겸임교수/법학박사

미국의 PA(진료보조)간호사는 의료에 관련된 일정한 임상경험과 PA코스라는 석사과정을 통해 의료 지식 등을 갖춘 자로서 법적인 자격을 부여받아 의사의 감독과 책임하에 일정 정도의 진료와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하지만 한국 의료법에서는 진료와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PA간호사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병원의 의사 인력 충원 문제로 인해 개별 병원마다 ‘임상전담간호사(CPN) 운영 지침’ 등을 통해 진료보조(PA)간호사를 확보하여 수술이나 시술 및 각종 처치 등에 관한 의사의 보조업무 등을 맡기고 있다. 사실상 전공의 수준에 해당하는 PA간호사는 전공의가 기피하는 흉부외과·비뇨기과 등 주로 외과 분야에서 의사 업무를 대리하여 활동하고 있다.

최근 의대 정원 문제로 의료파업이 사실상 진행되자 의료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PA간호사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이러한 정부의 대응은 의료계에서 전공의를 일정 부분 대체해 왔던 PA간호사가 사실상 허용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법이 현실의 변화를 반영함에 있어서 둔감하기는 하지만, 환경의 변화가 일정 정도 진행될 경우에는 기존의 제도적 완고함과 견고한 보수적 틀을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

의료계 파업이 이러한 변화를 초래하리라고 당사자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PA간호사 활성화 방침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의 변화를 담고 있기에 PA간호사의 제도적 편입은 시간문제라고 보인다.

PA간호사를 일찍부터 받아들인 미국의 간호사 제도는 의사로부터 독립된 지위에서 진료와 진단을 내리는 NP(임상전문)간호사를 정점으로 상당히 세분화된 계층적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국의 간호사 제도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간호사의 계층 상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이기도 하며, 간호직역과 의사직역 간의 장벽을 일정 정도 낮추는 기능도 한다.

PA간호사 활성화 방안은 평생교육 관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생교육은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자격증이나 기술획득을 위한 일선 학원의 교육을 비롯하여 직업 교육, 세미나, 공청회, 심지어 유튜브 등을 통한 모든 역량의 함양을 동등한 교육의 기회이며 성과로 간주한다.

또한 세대 간 교육 기회의 균등한 배분에도 방점을 두고 있어서 10~20대의 교육을 통한 자원획득의 공정한 기회 보장이 30~40대 그리고 50대 이후에도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10대와 20대 시절의 능력 있는 부모의 후원 등 운 좋은 교육환경으로 명성 높은 대학 진학이나 의사면허증 취득과 같이 일생의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편중된 교육 기회는 높은 진입장벽을 형성하여 사회적 차별과 갈등, 부의 부당한 편중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생교육 전문가들은 세대 간의 형평성 있는 교육 기회 부여와 현장의 경험을 통한 학습의 인정을 주장해 왔다.

실제로 간호사뿐만 아니라 대부분 노동자는 현장에서 책을 통해 배울 수 없는 암묵적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며 그렇게 축적된 노하우는 독보적인 장인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한다. 평생에 걸쳐 학습된 노동력의 가치는 자연스럽게 경제적 지위와 연결될 수 있어야 하지만, 학교 교육과 국가 면허증 제도는 높은 진입장벽과 견고한 카르텔 형성을 통해 그들만의 이익공동체를 만들어 내어 자연스러운 시장의 진입과 퇴출을 막고 결과적으로 자원의 순환과 분배도 왜곡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우연적 사건은 필연적 변화의 길로 인도하기도 한다.

우연적 사건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촉진자가 된다면 새로운 일의 발전과 적응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의대 정원을 둘러싼 의료계의 파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의료계로 가는 ‘돈’의 흐름에 관심을 끌게 했다.

젊은 인재들이 의사직을 선호하고 의대로 지원하고자 모이는 현상은 상대적으로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돈을 더 벌 수 있고 리스크도 작다면 그 영역에 입신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AI시대이다. 전 세계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디지털 전환)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의사과학자도 아닌 의사가 선호 직업의 정점에 있다는 것은 인재활용과 산업정책이 시대변화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하겠다.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의료계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유사직역 간의 통로를 형성하여 드나들 수 있게 해야 한다. PA간호사 활성화는 현장에서의 학습경험과 성과를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승인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는 평생학습을 통해 특정한 직업군의 배타적·독점적 지위를 허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작지 않은 반향이 예상된다.

인간의 학습은 학교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따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 노동 현장에서 체득된 학습은 변화와 혁신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진보는 생물학적 진화와 달라서 학습 등으로 획득한 것의 전승에 의해 일어난다고 했다. PA간호사 활성화 정책은 우연적 사건에 의해 학교 교육 중심의 기득권 카르텔을 깨고 현장 속에서의 학습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진보의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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