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로 세워진 집단학살 협약
‘피해국’ 이스라엘, 가해국 전락 위기
ICJ, 유죄 판결에도 책임 묻진 않아
네타냐후 “하마스는 새로운 나치”

76년 만에 같은 혐의를 두고 국제 법정에 선 이스라엘. 이번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이다. 사진은 1945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나치 강제수용소 중 하나인 에벤제 오스트리아 수용소에서 굶주림으로 거의 죽어가는 유대인들. (출처: 뉴시스)
76년 만에 같은 혐의를 두고 국제 법정에 선 이스라엘. 이번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이다. 사진은 1945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나치 강제수용소 중 하나인 에벤제 오스트리아 수용소에서 굶주림으로 거의 죽어가는 유대인들.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이솜 기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이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 이후 전 세계가 한 약속이다. 이 고귀한 열망의 핵심은 범죄 중의 범죄, 인류 최악의 범죄라고 불리는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이라는 새로운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할 것을 각국에 명문화하고 약속하는 협약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이 협약은 이스라엘이 유대인 국가로 건국된 해인 1948년에 작성됐다. 이제 이스라엘은 국가 정체성에 깊이 뿌리내린 바로 이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유엔 최고 법정에서 기소됐다.

지난달 26일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청으로 6개 항목의 임시조치 결정을 내린 데 이어 최종 판결까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역사적 피해자가 아니라 집단학살의 가해자일 가능성을 인정한 이번 판결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충격일 수밖에 없다.

◆고의성 유무가 집단학살 판단의 핵심

1948년 집단학살 범죄의 예방 및 처벌에 관한 협약은 이 범죄를 “국가, 민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저지른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살인,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해를 입히는 행위,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계산된 삶의 조건을 고의적으로 가하는 행위, 출산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행위, 아동을 강제로 이송하는 행위 등이 포함된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설립 조약인 로마 규정에는 전쟁 범죄, 반인도 범죄, 침략 범죄와 함께 ICC가 관할하는 범죄 중 하나로 이 내용이 반복적으로 명시돼 있다. ICC는 개인을 기소하며 국가 간 분쟁을 판결하는 ICJ와는 별개의 기관이다.

남아공은 서면 제출과 지난달 초 공청회에서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하고 심각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입혔으며 ‘집단으로서의 물리적 파멸’을 의도적으로 초래하는 등 집단학살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자국의 존재를 위협하는 하마스의 집단학살에 맞서 정당방위 차원에서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남아공의 주장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집단학살의 핵심 요소는 ‘고의성’이다.

협약에 명시된 기본 범죄 중 하나 이상을 입증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 민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의미한다. 이를 증명하기는 어렵다.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국제법 부교수인 마리케 드 훈은 최근 AP통신에 “(집단학살 혐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든 집단을 파괴하려는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그럴듯한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노트르담 대학교 크록 연구소의 법학 및 국제 평화학 교수인 메리 엘렌 오코넬은 “이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살인이 정부의 의도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나. 아니면 정부가 전쟁을 벌였고 그 전쟁 중에 이 특정 집단이 많이 죽었으나 그것이 정부의 의도가 아니었나”라고 물었다.

26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제소하고 요구한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 혐의와 가자지구의 즉각적인 휴전에 대해 조안 도노그 재판장이 발언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26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제소하고 요구한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 혐의와 가자지구의 즉각적인 휴전에 대해 조안 도노그 재판장이 발언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러·미얀마도 집단학살 소송 당해

국가 간 소송을 심리하는 ICJ는 지금까지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서만 판결을 내렸을 뿐, 집단학살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 물은 적은 없다. 이 때문에 집단학살 협약이 ‘실패’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7년 ICJ는 세르비아군이 1995년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무슬림 남성과 소년 약 8000명을 집단학살했다는 제소와 관련 집단학살 방지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한 바 있다.

현재 두 건의 다른 집단학살 사건이 ICJ에 계류 중이다.

우크라이나는 거의 2년 전 러시아의 침공 직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집단학살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에서 ICJ는 러시아에 침공 중단을 명령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어겼다.

또 다른 사례는 2019년 아프리카 국가인 감비아가 무슬림 국가들을 대표해 미얀마가 소수 무슬림 로힝야족에 대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감비아는 이슬람협력기구를 대신해 이 소송을 제기했다.

감비아와 남아공은 모두 자신들이 직접 관여하지 않은 분쟁에 대해 ICJ에 제소했다. 이는 집단학살 협약에 개별 국가, 심지어 관련 없는 국가도 유엔에 집단학살 행위를 예방하거나 진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ICJ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법원에서도 집단학살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구 유고슬라비아 법원은 전 보스니아 세르비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와 그의 군 수장을 포함한 피고인들에게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관여한 집단학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탄자니아 아루샤에 본부를 둔 르완다 재판소는 1998년 장 폴 아카예수에게 집단학살 및 기타 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는 국제 법정 최초의 집단학살 유죄 판결이었다. 아카예수는 1994년 르완다에서 후투족이 다수인 무장 세력이 소수인 투치족을 중심으로 약 80만명을 학살한 학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집단학살에 가담한 62명의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또 ICC는 축출된 수단 지도자 오마르 알-바시르를 다르푸르 지역 집단학살 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그는 아직 법정에 넘겨지지 않았다. 알-바시르 정부는 2003년 반란에 공중 폭격으로 대응했고, 이 정부의 비호 아래 탄생한 잔자위드는 학살, 고문, 성폭행, 방화, 약탈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약 30만명이 사망하고 270만명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캄보디아의 국내외 법원은 1970년대 잔혹한 통치로 약 170만명의 사망자를 낸 무장단체 크메르루주 소속 남성 3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중 두 명은 집단학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학살 혐의 받아들일 수 없는 이스라엘

집단학살 방지를 명령받은 이번 ICJ의 판결과 관련해 이스라엘 국민 사이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고 현지 매체인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1일(현지시간) 전했다.

이 판결 결과 자체가 이스라엘의 평판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국제적 위상을 더욱 약화할 것이라는 우려와 동시에 법원이 명령한 임시 조치가 비교적 온건했다는 반응이다.

ICJ는 매우 모호하게 이스라엘이 대량 학살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행위를 ‘중단’하거나 심지어 가자지구에서의 군사 작전을 중단하라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특정 명령을 준수하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ICJ가 내리는 결정은 구속력이 있는 명령이지만 집행을 강제할 수단은 따로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인 지난달 27일(현지시간) TV 기자회견에서 “ICJ가 이스라엘에 대한 ‘터무니없는’ 집단학살 혐의를 심리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하면서 “이 법정 소송이 새로운 나치인 하마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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