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역서 농민들 거리로
트랙터 몰고 도로·항구 봉쇄
생계 부담·과도한 EU 규제
우크라산 곡물 수입도 불만
극우 세력 편승 움직임도

(파리=연합뉴스) 29일(현지시간) 오후 파리 15번 고속도로에서 농민들이 트랙터 등을 몰고 나와 시위를 하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29일(현지시간) 오후 파리 15번 고속도로에서 농민들이 트랙터 등을 몰고 나와 시위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이솜 기자] 프랑스에서 곡물을 재배하는 제롬 레노는 소비자들에게 농업에 대해 교육하는 비영리 단체의 공동 설립자이자 파리 인근 일드프랑스의 지역구 의원이다. 그는 지난주 프랑스와 유럽연합(EU) 전역에서 확산하고 있는 농민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트랙터에 시동을 걸었다.

레노는 “정부 발표가 지켜지지 않은 지 몇 년이 지났다”며 “농사를 지으며 우리는 무게를 재고, 측정하고, 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제 계산은 끝났다”고 미국의소리(VOA)에 말했다.

유럽 농민들의 성난 민심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농가 소득은 점점 줄고, 친환경을 명분으로 한 각종 규제에 수입 농산물까지 늘어나자 유럽 전역에서 농민들이 거리 점령에 나섰다.

농민들은 정부와 소매업체가 식품 인플레이션을 낮추려고 하면서 에너지, 비료, 운송에 드는 높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 침공 이후 EU가 쿼터와 관세를 면제해 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대규모 수입과 EU와 남미 블록 메르코수르 간의 무역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이 재개되면서 설탕, 곡물, 육류의 불공정 경쟁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여기에 농민들은 농지의 4%를 휴경지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규정과 같은 EU 규정과 울타리 복구와 같은 프랑스의 지나치게 복잡한 EU 정책 시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 농민들의 불만은 최근 몇 달 동안 독일과 폴란드를 시작으로 네덜란드, 루마니아, 그리스, 스페인, 벨기에에 이어 농업 강국 프랑스까지 시위와 항구 및 도로 봉쇄로 폭발했다.

[파리=AP/뉴시스] 프랑스 농민 시위에 참가한 트랙터 운전자들이 1월 29일 파리 북부의 르와시앙프랑스 고속도로를 막은 채 반정부 항의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외국산 농산물 수입과 가격 경쟁의 불리한 조건 때문에 프랑스 농민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리=AP/뉴시스] 프랑스 농민 시위에 참가한 트랙터 운전자들이 1월 29일 파리 북부의 르와시앙프랑스 고속도로를 막은 채 반정부 항의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외국산 농산물 수입과 가격 경쟁의 불리한 조건 때문에 프랑스 농민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농업 강국 프랑스 시위 가장 격해

EU 최대 농산물 생산국인 프랑스의 농부들은 환경 보호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인해 숨이 막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충분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정부는 6월 유럽 의회 선거와 2월 말 연례 파리 농업 박람회를 앞두고 위기를 해소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에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지난 26일에 이어 30일에도 의회 연설에서 농가에 대한 새로운 재정 지원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프랑스 전국농민연맹(FNSEA)은 이날 정부가 발표한 여러 대책에도 다양한 불만에 대한 시위를 벌이며 파리로 향하는 주요 고속도로를 막았다. 브르타뉴의 농부들은 이날 흙 700톤(t)을 고속도로에 버리며 항의했고 남부 도시 툴루즈 주변에서는 지역 공항에 대한 접근을 막으려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파리 지역 시위대는 수도 주변의 주요 간선도로 8곳을 서서히 봉쇄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일부는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는 도매시장 룽기스 봉쇄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랑스의 많은 농부들은 해가 갈수록 더 가난해지고 있다. 반세기 동안 농장의 수는 150만개에서 현재 약 45만 6천개로 급감했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농민의 약 4분의 1이 빈곤하게 살고 있으며, 자살률도 높다.

파리 외곽에 농장을 운영하며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은 레노는 프랑스와 EU의 관료주의를 모두 비난했다. 그는 프랑스 농업에 불이익을 주는 국제 무역 협정과 함께 농부들에게 더 많은 보조금을 지급하고 디젤 세금을 폐지하기를 원한다.

레노는 살충제를 신중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자신의 사업을 훼손하지 않는 한 친환경 농업 관행을 따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레노는 건강하고 환경친화적인 식품 생산을 촉진하고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두 가지 주요 EU 조치를 언급하며 “그린 딜(Green Deal)과 팜 투 포크(farm to fork, 농장에서 식탁까지)는 훌륭해 보이지만 농업 생산성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정부는 시위가 격화되는 것을 경계해 이미 농업용 경유에 대한 보조금을 점진적으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철회하고 환경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오는 2월 1일 EU 정상회담에 농민들의 위기가 공식적으로 의제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정부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EU에) 우리 농민들을 위해 매우 구체적인 것들을 요청했다”며 특히 수입 농산물이 유럽 표준을 충족하도록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조시니=AP/뉴시스] 3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동쪽 조시니에서 농민들이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는 동안 닭 한 마리가 도로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정부의 농업 정책에 반대하며 2주째 시위를 이어가는 프랑스 농민들이 파리 외곽을 트랙터로 포위하고 시위 강도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문제가 됐던 농업용 경유 과세 조치를 철회하는 등의 조치에 나섰지만, 성난 농민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조시니=AP/뉴시스] 3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동쪽 조시니에서 농민들이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는 동안 닭 한 마리가 도로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정부의 농업 정책에 반대하며 2주째 시위를 이어가는 프랑스 농민들이 파리 외곽을 트랙터로 포위하고 시위 강도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문제가 됐던 농업용 경유 과세 조치를 철회하는 등의 조치에 나섰지만, 성난 농민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우크라 전쟁에 수입 제한 해제 영향도

농민 시위가 프랑스에 집중돼 있지만 최근 몇주간 EU 국가들 곳곳에서 비슷한 시위가 이어져 왔다.

이날 이탈리아 농부들은 밀라노에 인근에서 트랙터를 몰고 시위를 벌였다. 시칠리아에서는 농부들이 지난 여름의 장기간 폭염과 가뭄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은 지방 정부에 항의하며 도로를 막았다.

전날에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 주변 교통도 성난 농부들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 약 12대의 트랙터가 브뤼셀의 EU 지역으로 진입해 큰 경적을 울리는 시위를 열고 지브뤼게 컨테이너 항구의 진입로를 막았다. 또 농민들은 브뤼셀 중심부의 한 광장을 막아서며 적어도 2월 1일까지는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독일도 2024년 예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부가 농업용 경유에 대한 세금 감면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결정한 후 시위가 벌어지는 등 긴장에 직면해 있다. 이달 초 베를린의 중심 도로가 트럭과 트랙터로 가득 차면서 교통이 거의 정지되기도 했다.

스페인 농민 조합은 2월에 이 운동에 동참하고 시위를 조직하겠다고 밝혔으며 키리아코스 미토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다른 나라로 번지는 시위를 막기 위해 농민에 대한 재정 지원을 가속화하겠다고 제안했다.

[브뤼셀=신화/뉴시스] 30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농민들의 시위가 열려 트랙터들이 거리를 막고 멈춰 서 있다. 농민들은 유럽연합(EU)의 환경 규제 정책과 농산물 수입 계획 등에 항의하고 소득 감소와 생산 비용 상승에 대한 대책 등을 촉구했다.
[브뤼셀=신화/뉴시스] 30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농민들의 시위가 열려 트랙터들이 거리를 막고 멈춰 서 있다. 농민들은 유럽연합(EU)의 환경 규제 정책과 농산물 수입 계획 등에 항의하고 소득 감소와 생산 비용 상승에 대한 대책 등을 촉구했다.

이번 시위가 이같이 EU 곳곳에 퍼지게 된 데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영향도 있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흑해의 무역로가 완전히 차단됐다. 이에 EU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 제한을 일시적으로 해제해 우크라이나 농산물이 유럽 시장에 넘쳐날 수 있도록 조치했다.

BBC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평균 유기농 농장은 약 10㎢인 반면 유럽의 유기농 농장은 평균 0.41㎢에 불과해 공평한 경쟁이 아니라는 불만이 나온다. 이에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등 우크라이나 주변 국가의 농산물 가격이 갑자기 하락하면서 현지 농부들은 농작물을 팔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1년 전만 해도 우크라이나 난민을 환영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줄지어 서 있던 폴란드 도로는 이제 트랙터들이 막았다.

EU 곧 우크라이나의 이웃 국가에 대한 수출에 대해 무역 제한 조치를 취했지만, 이는 한시적이었다. 금지 조치가 만료되자 부다페스트, 바르샤바, 브라티슬라바 정부는 자체적인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우크라이나는 즉시 소송을 제기했고, 관계는 악화됐다.

이제 동유럽 국가들은 EU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역 자유화 조치를 확실히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루마니아에서는 농부와 운송업자들이 높은 경유 가격, 보험료, EU 조치, 우크라이나와의 경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1월 24일 농민들이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를 벌였다. 폴란드 농민 노동조합은 현지 언론에 “우크라이나산 곡물은 유럽이 아닌 아시아나 아프리카 시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에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3월 초에 우크라이나 대표를 만나 제품 운송 및 수출을 규제하는 협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시니=AP/뉴시스] 3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동쪽 조시니에서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던 농민들이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있다. 정부의 농업 정책에 반대하며 2주째 시위를 이어가는 프랑스 농민들이 파리 외곽을 트랙터로 포위하고 시위 강도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문제가 됐던 농업용 경유 과세 조치를 철회하는 등의 조치에 나섰지만, 성난 농민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조시니=AP/뉴시스] 3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동쪽 조시니에서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던 농민들이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있다. 정부의 농업 정책에 반대하며 2주째 시위를 이어가는 프랑스 농민들이 파리 외곽을 트랙터로 포위하고 시위 강도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문제가 됐던 농업용 경유 과세 조치를 철회하는 등의 조치에 나섰지만, 성난 농민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트랙터 올라타고 오는 극우 세력”

유럽 곳곳에서 우파 정당들은 농민들의 분노와 반(反)EU 및 반세계화 정서가 고조되는 상황을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국민연합(RN),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같은 우파 정당은 6월에 있을 EU 전체 선거를 앞두고 트랙터와 가축 퍼레이드 등 농민들의 분노에 편승했다.

지난 26일(현지시간) 폴리티코 유럽판은 “극우파가 유럽 전역에서 권력을 장악한다면 트랙터 뒤에 올라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사태를 진단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농민과 포퓰리스트의 연대가 900만명에 육박하는 유럽 농민들 사이에서 극우 정당의 매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번 시위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자국 농산물을 살리자’는 데 있다 보니 자칫하면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외국인과 외국 농산물, 환경주의자까지 한꺼번에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외교관계위원회에서 극우파에 대한 지지 급증을 연구한 정치학자 케빈 커닝햄은 폴리티코에 “농민들의 분노는 유럽 전역의 극우파에게 주요 이슈가 됐다”며 “가장 중요한 이슈는 아니지만, 경제 문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데는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 극우 정당인 RN 로랑 자코벨리 대변인은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오늘날 우리가 지불하는 것은 EU의 미친 환경주의자들의 징벌적 생태학”이라고 비난했다. 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는 시위대 사이에서 목격됐고, 독일 극우 정당인 AfD도 농민들의 대의를 옹호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부 레노는 “더 이상 정부를 믿지 않는 프랑스 농부들이 많다”며 “그들은 주류 우파와 좌파 정당도 믿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어 “그들은 극우 정당에 투표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라며 “이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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