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용 칼럼니스트

고등학교 여학생이 수업 시간에 매점에 가다 적발되자 중년의 남교사에게 대들며 따지는 영상이 확산하며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교사가 “들어가”라고 말하자, 여학생은 “왜 저한테 소리를 지르세요? 저도 남의 집 귀한 딸 아니에요? 저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 아니에요”라며 대든다. 주변의 학생들이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볼 때, 영웅 심리에서 일부러 영상까지 찍으며 하는 언행으로 보인다. 작년에 찍은 영상이지만 논란이 되자 해당 여학생은 진로 문제로 자퇴했다며 사과문까지 올렸다.

여학생의 말과 행동이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이 영상으로 마녀사냥은 옳지 않다. 지금 학교는 이 학생보다 더 심하게 교사에게 막말까지 하며 대드는 학생 천지다. 이런 수준의 말대꾸는 양호한 편이고 교사들은 늘 겪는 일이다. 현재 학교 안의 모습으로 따지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필자가 중학교 근무 당시에도 이런 부류의 학생이 많아 힘들었다. 교사와 말다툼해서 이기는 게 좋은 게 아닌데, 무례한 아이들은 자랑으로 여기니 억장이 무너진다.

“남의 집 귀한 딸”이라고 대접해달라고 항변하기 전에, 교사도 누군가에게 존경받는 아버지이고 부모란 사실부터 기억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게 바른 자세다. 변형한 짧은 교복 치마에 삐딱한 자세로 서서 교사에 대드는 건 “나는 가정에서 절대로 귀하게 대접받지 않고 자랐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귀하게 키우는 건 오냐오냐 키우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사랑받을 만한 언행을 하도록 예의 바르게 키우는 걸 의미한다.

정말로 가정에서 귀하게 자란 아이들은 교사를 존중하고, 교칙도 잘 지킨다. 귀함은 행실에서 나온다. 타인으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길 원한다면, 우선 나 자신부터 먼저 귀하게 행동해야 한다. 귀하게 키움 받지 못한 아이는 학교에서 천방지축 행동하고 말한다. 못된 행실을 방치하거나 가르쳐주지 않은 부모의 책임이 가장 크다. 자식이 학교에서 하는 행실은 부모를 욕되게도 하고 존경받게도 한다. 자식의 행동은 오롯이 부모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수업 중에 매점 가거나 일명 ‘땡땡이’라고 학교를 벗어나는 일탈 행동은 오래전부터 학생들이 자주 하던 행동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교사에게 적발되면 “죄송합니다”라며 벌을 받고 반성이라도 했다.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고 반성하는 건 학생의 기본자세다. 그래야 추억으로라도 남는다.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영상처럼 적반하장으로 대들고 반성하지 않는다. 예의와 염치를 가정에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경찰에 검거된 뒤에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건 부모의 잘못된 가르침 탓이다.

영상 속 학생과 같은 핫팬츠 수준의 교복 치마는 언제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학교에서 왜 교복을 단속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자칫 잘못 단속했다가는 성희롱으로 고소당하니 포기한 지 오래다. 교문에서 학생부 교사들이 복장 단속하던 시대도 옛날이다. 지금은 ‘교문 맞이’라고 명칭도 바뀌어 반갑게 인사만 하고 학생을 귀빈 대접하듯이 맞이해야 한다. 자칫 훈육하고 선도하려다가는 교원 평가에서 악플 세례를 받고, 학부모 민원에 시달리니 복지부동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얼마 전 일본 오키나와를 여행하면서 만난 일본 여학생들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두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교복 치마를 입은 모습이 예뻐 보였다. 학생은 교복을 교복답게 입도록 가르쳐야 한다.

학생들이 동네 어른에게도 삼가야 할 행실을 거리낌 없이 교사에게 해도 제재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게 우리 교육의 현주소다. 교권이 추락해 교사가 학생을 나무라지 못하는 학교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이제라도 국민적 분노와 공감대가 확산하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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