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릉➀-제16대 인조, 인열왕후

의병 일으킨 후 왕위에 올라서
'이괄의 난'으로 공주산성 피난
정묘호란 때는 강화로 몸 피해
후금과 관계 악화, 내부도 혼란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조선왕릉의 장릉은 세 곳이다.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인조와 인열왕후), 김포의 장릉(章陵, 인조의 부모: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그리고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 단종)이 있다. 인조의 장릉은 1635(인조 14)년 인열왕후가 죽으니 이듬해에 파주 운천리 장릉에 묻혔고, 1649(효종 즉위)년 인조가 승하하니 왕후 옆에 쌍릉으로 조성했다. 그러나 1731(영조 7)년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뱀과 전갈의 무리가 석물 틈에 서식하니 현재 자리로 천장하며 합장했다. 인조는 백부 광해군을 내치며 왕이 됐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막중한 시기의 왕이었다. 하지만 이괄의 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와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군사를 내세워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공과와 삶의 흔적이 깃든 장릉을 찾아본다.

◆광해군과의 애증

인조(1595~1649)는 할아버지 선조처럼 아버지가 왕이나 왕세자가 아닌 후궁의 손자였다.  선조의 왕후들이 자식이 없어 두 후궁 공빈 김씨(광해군 사친), 인빈 김씨(정원군 사친)가 왕실을 이었다. 인조는 정원군과 군부인 구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07년 능양군이 됐고 1610년 한준겸의 딸 한씨(인열왕후, 1594~1635)와 결혼했다. 인조와 인열왕후 사이에 6남 1녀를 낳아 이중 4남(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이 살아 장성했다. 1635년 인열왕후가 42세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음해 29세 연하 장렬왕후 조씨(1624~1688)가 계비로 책봉됐으나 자식은 없었다. 후궁 4명 중 귀인 조씨가 유일하게 자녀(2남 1녀)를 두었다. 광해군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훗날 대원군, 추존 원종)과 이복형제로써 사이가 좋았고 조카인 인조 또한 아꼈다. 1610(광해 2)년 6월 11일 광해군은 정청에 전교하기를 “능양군은 정원군의 장자로서 선왕께서 늘 어여쁘게 여기셨다. 지위를 올릴 때 친히 전하라”고 했다. 그러나 인조의 친동생 능창군이 1615년 11월 10일 역모협의로 강화 교동으로 귀양을 간 후 일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실록은 “능창군 이전을 찬 돌방에서 자게하고,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을 주니 먹지 못하였다. (중략)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어느 하루 관동(심부름하는 아이)을 시켜 부모에게 이별의 편지를 보내고 목을 매어 죽었다”고 했다. 17세 막내아들 능창군이 참혹한 화를 당하자 아버지 정원군이 술로 비통함을 달래다 병을 얻어 눕고 말았다. 1619년 12월 19일 정원군이 죽었다. 광해군이 이르기를 “장례 전에 존호를 올리고 연례를 하도록 급히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했다. 1623년 왕이 된 인조는 숙부인 광해군을 폐했지만 개인적으로 안타까워했다. 4월 10일 하교하기를 “폐인(광해군)의 죄악이 중하지만 선왕(선조)의 자식이다. 그가 위리 안치되어 괴롭게 지내는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인조는 옷을 넉넉히 보내고 소선(머리빗과 부채)을 지급하도록 명했다.

인조와 인열왕후의 합장릉이다. 봉분의 좌우와 후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있다. 1636년 파주 운천리에 인열왕후와 인조의 쌍릉이었으나 1731(영조 7)년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며 합장릉이 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인조와 인열왕후의 합장릉이다. 봉분의 좌우와 후면을 곡장으로 둘러싸고 있다. 1636년 파주 운천리에 인열왕후와 인조의 쌍릉이었으나 1731(영조 7)년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며 합장릉이 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서인과 함께 군사 일으켜

인조가 즉위하기 전부터 조정은 사분오열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들은 1575년 동인(김효원)과 서인(심의겸)으로 나뉘고 선조 후기에 동인은 남인(이황 계열)과 북인(조식 계열)으로 갈라져 서인·남인·북인이 겨뤘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정인홍, 곽재우 등 의병활동으로 공을 세운 북인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됐다. 선조는 유영경 등 소북파를 중용했고 이들은 적통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했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대북파의 지원을 받은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대북파는 기세등등했으나 페모살제와 친명배금의 정책으로 비판받았다.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정변의 기미를 알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623(인조 1)년 3월 13일 실록은 “상(능양군, 훗날 인조)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키고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고 했다. 대비는 인조를 왕으로 인정하며 “상은 총명하고 어질며 비상한 위의가 있어 선조께서 몹시 사랑하여 궁중에서 길렀다”고 했다.

장릉 ‘봉분’이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장릉 ‘봉분’이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인조에게 닥친 혼란과 시련

그러나 인조에게 큰 시련이 다가왔다. 1624년 1월 24일 반정공신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태안군수를 지냈다. 1624년 정월, 이괄과 아들 이전, 한명련·정충신 등이 반역한다는 무고가 있자 궁궐에서 이전을 잡으러 오니 이들을 죽이고 1만 2천명의 군사로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이괄 측의 40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전세는 불리했다. 2월 8일 이귀가 왕에게 “일이 급해졌으니, 상께서는 오늘 저녁에 피하셔야 하겠습니다”고 하여 결국 공주 산성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한강에 이르니 밤이 깊고 매우 차가웠다. 강물 위에서 도성을 돌아보니, 궁궐이 불태워져 불꽃이 치솟았다. 온갖 병력과 의병을 동원했다. 반군의 기세는 거셌다. 인조는 공주에 머물며 수비를 논의했다. 그러던 중 14일 “적이 이천으로 향하여 경안역 근처에서 머물러 묵었는데 그의 수하 사람에게 참살되었다합니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15일 적장 이수백·기익헌 등을 베었다. 16일 흥안군(인조의 이복동생)을 죽였다. 실록은 “이제는 이괄과 음모하고 상이 피난하니 뒤로 도망쳤고 이괄 군사에 음식을 먹이니 이괄이 왕으로 삼았다. 이괄과 함께 달아났고 이괄이 참살되니 도망쳐 숨었으나 결국 잡혀 심기원·신경진이 장만과 상의하여 군중에서 목매어 죽였다”고 했다. 이괄이 죽고 사태가 진정되자 왕은 1624년 2월 18일 공주를 떠나 22일 저녁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장릉 향로와 어로다. 숙종의 명릉처럼 양 옆에 신하들이 다니는 변로를 깔아 4개의 길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장릉 향로와 어로다. 숙종의 명릉처럼 양 옆에 신하들이 다니는 변로를 깔아 4개의 길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후금 배척하니 정묘호란

조선의 주변정세는 혼란스러웠다. 명나라와 여진족이 만주에 건국한 후금(1636년 청으로 바꿈)의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이었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인조가 ‘향명배금’ 정책을 펼치고 명나라 군사에 요동수복을 위한 가도(평북의 작은 섬)주둔과 군사를 요청하자 이를 수용했다. 후금은 이에 조선 정복을 경고했다. 때마침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됐다며 조선을 공격하자고 했다. 1627년 정묘년 1월 13일 후금이 의주를 침략했다. 17일 보고 받은 인조는 “이들이 모장(명나라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우리나라를 치기 위한 것인가?”하니 장만이 “우리를 치려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만반의 대응을 하도록 했다. 3만의 후금군은 투항한 조선군 강홍립 등을 앞세워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며 진군했고 조선은 역부족이었다.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했다. 후금군은 2월 9일 사신을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 연호 사용 금지, 왕자 인질, 형제국 관계 등을 요구했다. 결국 3월 3일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는 적대시하지 않는 조건의 정묘조약을 맺고 정묘호란을 종식시켰다.

장릉 병풍석으로, 천장하면서 기존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 대신 모란꽃과 연꽃문양을 새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장릉 병풍석으로, 천장하면서 기존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 대신 모란꽃과 연꽃문양을 새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정묘호란이 일단락됐지만 내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1627년 9월 횡성의 이인거가 무단히 군사를 일으켰다. 후금과 화친을 주장한 조정의 세력과 오랑캐를 정벌하겠다는 명분이었다. 다음해 1628년 6월 유효립 등 50여명이 모반을 하다가 처형당했다.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 이공(선조-정빈 민씨의 장남)을 추대하려다 실패했다. 10월 명나라 모문룡의 군대가 의주에 침입했다. 1629년 2월 김경현의 역모 고발사건이 있었고 11월에는 양경홍이 후금과 내통해 역모를 꾸미다 발각돼 처형됐다.

장명등과 망주석이다. 장릉은 천장하면서 기존의 17세기 석물과 새로운 18세기 석물이 섞여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장명등과 망주석이다. 장릉은 천장하면서 기존의 17세기 석물과 새로운 18세기 석물이 섞여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후금과 조선 관계의 악화

주변국 특히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다. 1628(인조 6)년 이후에는 조선의 예폐(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와 약간의 생활 필수품을 제공했다. 그러나 후금은 식량과 병선을 요구했고 민가를 약탈했다. 이에 조선은 척화배금(화의를 반대하고 후금을 배척함)을 외쳤다. 후금은 조선에 ‘군신의 예’로써 조공을 바치라고 했고 조선은 “외교를 단절하고 아예 후금을 치자”고 했다. 1633(인조 11)년 1월 29일 인조가 “우리가 보낸 폐물을 되돌려 보내면서 더 내라고 협박하였다. 심지어 글을 보내 업신여기고 방자하여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중국(명나라)처럼 대접해주고 배와 군사를 달라는 것이다. 모두 함께 원수에 대항한다면 두려워할 바가 없다. 후일의 하명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5~6개월분의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금을 당할 수는 없으니 읍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1634년 1월 8일 인조는 국서를 보내며 “춘신사(후금에 보내는 사신) 편에 안부를 여쭙고 아울러 토산물을 보내 작은 성의를 표 합니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후금의 사신은 예물이 적다고 물리치며 회첩만 줬다. 6월 20일 후금의 칙서가 왔다. 그 내용은 “이제 세자를 책봉하였으니, 왕은 세자로 하여금 국가를 보전케 해야 할 것이다. 짐의 명을 어기지 말고 공경히 받들라. 이에 유시한다”고 했다. 후금은 조선 왕보다 세자에 우호적이었다. 11월 12일 후금 왕이 “예단을 줄였고 우리가 원정한 것을 위로하지 않았다”며 사신 나덕헌을 사로잡고 글을 보내왔다. 30일 나덕헌이 “명과 조선이 후금을 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1635년 5월 2일 금나라 사신 마부달이 오랑캐 상인 1백 60명과 입경했다. 후금은 많은 물품을 요구했다.

장릉 ‘습지’. 1799(정조 23)년 홍살문 밖 습지에 오리나무, 버드나무, 노송나무를 심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장릉 ‘습지’. 1799(정조 23)년 홍살문 밖 습지에 오리나무, 버드나무, 노송나무를 심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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