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왕 광해군·문성군부인의 묘

17세 왕세자 돼 왜란 수습에 나서
민심 수습하고 중립외교에 힘써
가족 잃고 말년에 참혹한 삶 보내
조선의 두 번째로 쫓겨난 왕 돼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도 남양주에는 왕릉 4기(광릉·홍릉·유릉·사릉)가 있다.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왕의 무덤이 있으니, 바로 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 묘’다. 조선의 두 번째 폐왕 광해군의 묘는 1623년 강화도에서 죽은 부인 류씨(문성군부인)의 무덤이었다. 18년 후 광해군이 제주에서 세상을 뜨니 군부인 옆에 쌍분으로 자리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자 세자가 되어 아버지 선조와 역할을 나눠 나라를 살폈고 왕이 되어서는 개혁정치를 펼치며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반대세력을 탄압하면서 폭군이자 패륜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의리를 배신한 군주로 귀결됐다. 얼마안가 조선이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서야 광해군의 외교는 재평가됐고 그의 많은 정책이 시의적절 했음이 인정됐다. 그럼에도 영원히 복권되지 못했고 부인과 처가, 아들까지 모두 죽고 말았으니 말년에 참혹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광해군묘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니 마치 죽어서도 유배 생활을 하는 것이다. 광해군묘와 사친 공빈 김씨의 성묘를 찾아가 본다.

‘광해군묘’.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의 쌍묘이다. 1623년 문성군부인이 강화도에서 죽자 양주 적성동(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묻혔으며 18년 후 1641년 광해군이 제주에서 세상을 뜨니 옆자리에 묻혔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광해군묘’.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의 쌍묘이다. 1623년 문성군부인이 강화도에서 죽자 양주 적성동(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묻혔으며 18년 후 1641년 광해군이 제주에서 세상을 뜨니 옆자리에 묻혔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17살 광해군, 임진왜란에 나서다

선조는 의인왕후가 있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 후궁 공빈 김씨에게서 첫아들 임해군을 그리고 3년 후 1575년에 광해군(이혼)을 낳았다. 공빈 김씨가 2년 후 24세로 세상을 떴다. 광해군은 1587년 류자신(태릉참봉)과 좌의정 정유길의 딸 정양정과 결혼했다. 큰아들 임해군은 품행이 바르지 못했으나 광해군은 달랐다. 광해군은 1592년 17세에 피난처인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됐다. 분조(선조 때 임시로 둔 조정)를 해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을 다니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으는 등의 활약을 했다. 1593년 8월 16일 왜와 명의 군대가 철수하니 경략이 자문하기를 “듣건대 광해군이 영웅 풍채에 위인의 기상으로 준수·온화하며 어리나 재능이 뛰어나다 하니, 전라·경상·충청도를 순찰하면서 모든 일을 그의 결재를 받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1595년 3월 27일 명나라 주청사가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광해군 그대에게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군무를 총독하도록 특별히 명한다”고 했다. 광해군은 한양수복 후 무군사로써 수도를 지켰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서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과 군량 및 병기조달 등을 점검하고 백성들을 살피기도 했다. 1598년 12월 31일 원자인 아들(이지)을 낳으니 전쟁의 먹구름에 갇혀있던 왕실은 경사를 맞게 됐다. 조선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광해군묘는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사적 제363호로 지정돼 있으며 왕자의 예로 무덤이 조성돼 묘표석과 장명등, 문석인 한쌍과 망주석 만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광해군묘는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사적 제363호로 지정돼 있으며 왕자의 예로 무덤이 조성돼 묘표석과 장명등, 문석인 한쌍과 망주석 만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아버지 선조에 이은 ‘취약한 정통성’

왜적이 물러가고 명나라와 조선의 군사들도 철수했다. 본격적인 복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때 왕실에 변화가 생겼다. 1600년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세상을 뜨고 1602년 이조좌랑 김제남의 딸이 새 왕비(인목왕후)로 책봉됐다. 광해군보다 9살이 아래였다. 그런데 1606(선조 39)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출산했다. 광해군의 세자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선조의 승하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알리고자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 중국은 장남 임해군이 계승하지 않은 이유를 따지며 확인하려 했다. 결국 임해군이 미친 행세를 해 사태는 일단락됐다.

광해군묘의 묘표석에는 ‘광해군지묘’, 부인은 ‘문성군부인 류씨지묘’라고 적혀있다. 광해군묘(송능리 산 59)에서 1.5㎞의 거리에 어머니 공빈김씨의 성묘(송능리 산 55)가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광해군묘의 묘표석에는 ‘광해군지묘’, 부인은 ‘문성군부인 류씨지묘’라고 적혀있다. 광해군묘(송능리 산 59)에서 1.5㎞의 거리에 어머니 공빈김씨의 성묘(송능리 산 55)가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광해군의 과제, 외교와 국가재건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국가재건에 나섰다. 대지주의 반대에도 1608년 선혜청을 둬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아울러 양전(토지조사, 1611년)을 실시했다. 일본과는 기유약조(己酉約條, 1609년)로 외교를 재개하고, 오윤겸을 일본에 파견해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왔다. 대외적으로는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여진족이 성장해 후금(훗날 청나라)을 건국하고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 지원으로 재정과 군사력이 약해져 기울고, 후금이 떠올랐다. 조선은 그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광해군은 성곽과 병기를 정비하고 군대를 강화했다. 1618년 명-후금전쟁이 발발해 명의 원군요청에 강홍립과 1만 병사를 파견했고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1619년)하도록 교지를 내려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보였다. 말기에는 여수에 이순신대첩비를 건립하고 비변사의 국경방위를 강화하고 승군을 모집해 침략에 대비했다.

내부적으로는 임진왜란으로 부서지고 불타버린 궁궐을 보수하고 건립했다. 창덕궁, 창경궁(홍화문, 명정전, 명정문),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을 복구 조성했다.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 ‘선조실록’과 허준에 ‘동의보감’을 마무리하도록 했다. 담배의 전래, 대포의 제조, 은광의 개발 등이 이루어졌고 각지에 서원(경현, 자운, 백운)을 건립하기도 했다. 적상산성(고려 말에 축조한 전북 무주군 적상면에 소재한 성곽)에 사고(史庫, 실록보존소)를 설치했다.

성묘의 무석인은 광해군의 묘에는 없다. 왕후의 능으로 조성하였기에 무석인, 난간석, 석양과 석호, 혼유석 등이 갖춰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성묘의 무석인은 광해군의 묘에는 없다. 왕후의 능으로 조성하였기에 무석인, 난간석, 석양과 석호, 혼유석 등이 갖춰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두 가지 늪에 빠지다

그럼에도 내부정치는 원만치 않았다. 대북파 정인홍과 이이첨 등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 영의정 유영경을 탄핵해서 사사했고, 1609년 9월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이 사사됐다. 1613(광해군 5, 계축)년 소위 ‘칠서지옥(七庶之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벌어졌다. 박순(우·좌·영의정 3정승을 지낸 사림인물)의 서자 박응서 등 서자 7명이 차별에 울분을 품어 모사를 꾸미고 자금을 마련코자 조령(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했다. 이들을 체포 취조하니 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외손자 영창대군을 추대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인목대비는 서궁에 갇히고 아버지 김제남과 남동생들, 아들 영창대군까지 죽임을 당했다. 능양군(훗날 인조)의 동생 능창군은 무고로,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으로 죽었다. 이어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광해군은 “내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이다지 혹독한 형벌을 내리는가. 차라리 세상을 멀리 떠나 해변가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 다시 이런 말을 하지 말라”며 거절했으나 결국 1618년 1월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서궁’이라 하라했다.

그러자 숨죽여 참고 있던 서인들이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왕이 친족을 죽이고 대비를 폐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명나라를 배신하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태의 잘못됨을 느낀 왕비 류씨는 1622(광해 14)년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의 잘못을 지적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결국 1623년 4월 11일 인조반정이 벌어졌다.

성묘는 광해군의 사친 공빈 김씨의 무덤이다. 1610(광해군 2)년 광해군이 어머니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성릉’이라 올렸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니 성묘로 강등됐다. 그러나 왕릉의 제도로 조성된 그대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성묘는 광해군의 사친 공빈 김씨의 무덤이다. 1610(광해군 2)년 광해군이 어머니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성릉’이라 올렸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니 성묘로 강등됐다. 그러나 왕릉의 제도로 조성된 그대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1.05.

◆또다시 왕이 쫓겨나다

연산군이 신하들에 의해 폐위된 지 117년 만에 이번에는 왕이 조카에게 쫓겨난 것이다. 이귀, 김류, 최명길, 이서 등과 함께 인조가 반정을 했고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을 폐하라고 청했다. 대비는 폐위하는 교서(1623년 3월 14일)에 36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대비는 “내 비록 부덕하나 선왕의 배우자로 일국의 국모된 지 몇 해이니 선묘의 아들이 나를 어미로 삼아야 하거늘 광해는 간신을 믿고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품 안의 어린 자식(영창대군)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어 인륜의 도리가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궁궐을 지어 토목 공사가 10년에 이르렀고, 구신들은 다 내쫓으며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꾼만 높이고 신임하였다. 백성들은 도탄에서 울부짖어 종묘사직이 위태로웠다. 군신과 부자의 예로 2백년 섬겨온 중국의 임진년 은혜를 배반하고 오랑캐에 성의를 베풀고, 기미년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추한 소문이 사해에 퍼졌다. 천리와 인륜, 종묘사직과 만백성에게 죄를 짓고 원한을 맺었다.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라고 했다.

◆참혹한 시련,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   

광해군과 폐비는 강화도 교동의 동문에, 폐세자 이질과 세자빈은 서문에 안치됐다. 1623(인조 1)년 폐세자는 탈출하려다 잡혀 사사됐고 세자빈은 자결했다. 폐비 류씨는 이 소식을 듣고 7개월 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폐비의 묘는 음력 윤10월 29일 양주 적성동(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조성됐다. 인조는 광해군이 쫓겨났으나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려했다. 광해군이 위중하여 자주 내의에게 병세를 살피게 했고, 옷감이나 잡물을 챙기게 했고 음식 접대에 소홀하지 말라고 했다. 1629년 광해군이 외부와 서신으로 내통하는 일이 발각됐어도 옷감을 챙겨 보냈다. 광해군은 14년 후 1637(인조 15)년 제주도로 옮겨졌고 4년 후 1641년 세상을 떠나니 67세였다. 조선왕으로써는 4번째 장수하였고 폐위돼 18년을 더 살았다. 왕에서 물러나 여생을 산 임금은 태조(10년), 정종(19년), 태종(4년), 단종(2년), 고종(12년), 순종(16년) 등 7명이었다. 광해군이 죽으니 인조는 사흘간 조회를 하지 않았고 연산군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비록 왕이 됐으나 본인은 물론 형제, 부인과 아들, 며느리까지 비극적 생을 마감했으니 그 흔적이 외딴곳 ‘광해군 묘’에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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