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한때 북한의 외교적 공세가 찬란하던 시절도 있었다. 적어도 1970년 말까지였다. 그 당시 남북한의 외교적 역량은 도토리 키 재보기였다. 특히 1970년대 중반 비동맹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저 아프리카 등 좀 문명이 뒤떨어진 나라들에서 평양정권의 인기는 괜찮았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체육관이나 건설해주고 농기계 몇백대 집어주면 김일성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 무덤으로 가 버렸다. 북한 경제가 무너져 내리며 국제적 위신도 함께 하강했다. 고난의 행군을 겪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해외 공관들은 도산과 파산을 이어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돈이 없어 공관 수도세와 전기세도 제대로 못 내는 북한과 어느 나라가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들겠는가.

오늘날 북한은 수교국 대비 재외공관 운영수가 유난히도 부족한 국가다. 159개국과 수교하면서도 재외공관은 50여개 수준을 간신히 유지해 왔다. 고립된 국가라는 점에서 외교의 중요성이 일반국가보다 낮은 것도 이유로 거론되지만 사실 재외공관을 운영할 만한 역량이 안되는 것이 더 큰 이유다. 그런데 최근 스페인, 우간다, 앙골라, 홍콩 등 4개의 재외공관도 폐쇄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앞으로도 10여개 이상의 국가에서도 재외공관을 폐쇄할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결국 재외공관 수는 더 현저하게 줄어들 전망이다.

외교적 레버리지 제고에 있어서 핵심적 자산인 재외공관을 줄이는 북한의 조치는 현재 북한이 구사하고 있는 대외전략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러시아로 찾아가 푸틴을 만날 때만 해도 마치 국제무대에 달려나갈 듯하더니 그 기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판단한 북한은 현재 그 지위에 부합하는 대외적 역할에 공세적으로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대만 문제 등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은 핵강국으로서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런 의지의 표명은 북한-러시아 간 무기거래에서 보듯이 실제 가시화된 정책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처럼 북한은 국제문제에 관여해 외교적 레버리지를 높이는 데 진력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재외공관이라는 자산도 더 필요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교두보가 있어야 국제무대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제난과 자금난에 허덕이는 북한은 되레 재외공관을 줄일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처해있다. 모든 돈을 끌어모아 핵무기를 만들고 나아가 이를 더욱 고도화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핵무력을 등에 업고 외교적 레버리지 신장에 나서고 있는데 정작 핵무기 제작으로 국가 재원을 탕진해 외교적 레버리지의 핵심적 자산인 재외공관은 폐쇄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는 북한이 직면한 딜레마와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현재 북한의 식량난이 매우 심각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보다 더 열악하다는 우려도 있다. 그런데 북한은 불필요한 핵안보를 위해 식량안보를 포기하는 선택을 이어오고 있다. 핵안보는 김정은 정권을 위한 것이고, 식량안보는 북한주민을 위한 것이 근본적인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본질이 다른 안보의 패러다임이다. 반면 한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도 최근 외교적 레버리지가 매우 높아진 상황이다. 한미동맹 수준은 역대 최강이고, 사실상 한국이 주도해 한미일 소다자 협의체도 구현해 냈다. 나토-AP4 융합외교에서도 한국은 주도적 역할에 나서고 있고, 대중동 외교를 추동한 결과 제2의 중동 붐이라는 선순환을 창출해 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근간으로서 GPS 외교와 인도-태평양전략이 가동되고 있다. 이러한 선순환을 이어가기 위해 한국은 내년에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마셜제도, 보츠와나, 수리남, 슬로베니아, 시에라리온, 아르메니아, 에스토니아, 자메이카, 잠비아, 조지아 등 12개국에 추가로 재외공관을 개설해 총 177개국에서 재외공관을 운영할 예정이다. 김정은 정권은 외교가 뭔지 알고나 있을까? 교두보 없는 외교는 발사대 없이 미사일을 날려보내겠다는 망상 그 자체다. 제발 북한 인민들 생계부터 우선 해결하고 비대칭 전력 개발에 매달리지 않으면 외교는커녕 내치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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