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우리는 젓갈의 왕국이라 할 정도로 젓갈이 잘 발달됐다.

물론 젓갈이 한국 특유의 음식이라고만 볼 수 없다. 중국에도 ‘해(醢)’라고 해서 젓이 있고, 일본에도 ‘시오카라(鹽辛)’라고 해서 젓갈이 있다.

다만 영어 영역에는 젓갈이 없는 것 같다. 그러기에 ‘젓갈’을 나타내는 말이 따로 없다. 굳이 젓갈을 나타내려면 ‘간장에 담근 고기’ 곧 ‘meat preserved in soy’라고 풀어 표현해야 한다.

젓갈의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훈고서이며,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취급되는 ‘이아(爾雅)’로 생선으로 만든 지(鮨)와 육류로 만든 젓갈인 해(醢)가 나와 있다.

우리가 젓갈을 언제부터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젓갈 해가 나오는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로 신문왕 3년 (683년)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歆運)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때, 납폐품목으로 쌀, 술, 장 육포 등과 함께 젓갈을 가리키는 해가 기록돼 있다.

젓갈과 식해를 모두 해라고 하는데, 한문으로는 육류, 어류, 조류 등을 소금으로 염장한 것인데, 이 젓갈을 한문으로 염해(鹽醢)라고 하며, 식해(食醢)는 육류, 어류, 조류 등에 고춧가루, 무, 소금, 밥, 엿기름을 섞어 발효시킨 저장식품이다.

물고기를 이용한 어해(魚醢)는 물론 쇠고기로 담는 담해(醓醢), 돼지고기로 담는 효해(膮醢) 또는 해시(醢豕), 사슴고기를 재료로 하는 녹해(鹿醢), 토끼고기를 재료로 하는 토해(兔醢) 등 육고기를 재료로 하는 젓갈과 꿩을 재료로 하는 치해(雉醢), 기러기 고기를 재료로 하는 안해(雁醢), 오리고기를 재료로 하는 압해(鴨醢), 거위를 재료로 하는 가해(鴐醢) 등 조류를 재료로 하는 젓갈 등이 있다.

조개류인 패류로도 젓갈을 담았다. 특히 참치, 명태 등의 내장을 이용한 젓갈은 물론 물고기의 알을 이용한 난해(卵醢) 등 조선의 젓갈은 수백 종류가 될 것 같다.

송나라 사신이었던 서긍(徐兢)이 1123에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보면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상용하던 음식이 젓갈이다’라고 나온다.

젓갈이 삼국시대에 납폐음식으로 보낼 정도로 귀한 음식이지만 고려시대에는 신분의 귀천 없이 먹는 일상적인 음식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젓갈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이는 젓갈이 단순히 일상식(日常食)의 의미를 넘어 궁중의 종묘제례(宗廟祭禮) 및 사대부의 봉제사(奉祭祀) 등의 제사상에 올리는 제물이었기 때문에 다양하게 발달했던 것 같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仁祖) 16년(1638) 5월 11일 자를 보면 ‘제사에 쓰는 젓갈에는 비(蠯), 나(蠃), 지(蚳)의 물품이 있는데, 주(註)에 방합(蜯蛤), 나개(螺蚧)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의 생합(生蛤), 소라(小螺), 백하(白蝦) 등으로 담근 정미한 젓갈입니다’라고 나온다.

이러한 젓갈이 뇌물로도 받쳐졌던 것 같다.

태종(太宗) 1403년 8월 21일 사간원(司諫院)에서 왕에게 올린 상언 내용으로 보면 “백하해(白蝦醢), 해해(蟹醢), 담해(醓醢), 토해(兎醢), 어해(魚醢), 치해(雉醢), 녹해(鹿醢) 등 삭여서 만든 젓갈인 해(醢)·죽목(竹木) 등물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무겁게 실어다가 공사처(公私處)에 널리 뇌물을 행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샀으니 가죽을 벗기고 살을 도려내듯이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할박(割剝)하여 생민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이렇듯 다양하게 발달해 오던 젓갈이 어패해(魚貝醢)를 제외하고 담해(醓醢), 토해(兎醢), 치해(雉醢), 녹해(鹿醢) 등은 지금은 사라진 음식이 됐다.

K-culture 시대 사라진 우리의 전통음식을 되살려 세계인의 입맛에 다가가는 데, 젓갈도 한 몫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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