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전복은 한자어로 ‘복(鰒)’ 또는 포(鮑)라고 부른다. 전복 말린 것은 건복(乾鰒)이라고 한다. 건복은 딱딱해서 그대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망치로 두드려서 부드럽게 한 것을 추복(搥鰒)이라하고, 길고 가늘게 썬 것은 조복(條鰒), 납작하게 펴서 말린 것은 인복(引鰒)이라고 한다.

대부분 조공(租貢)을 올릴 때는 소금에 약간 절인 생복(生鰒), 반 건조한 반건전복(半乾全鰒)이라 했다.

조선 중기 원명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으로 알려진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요리서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에서는 전복에 관한 기록으로 ‘어육류06-생포간수법’에서 전복에 참기름을 발라서 보관・저장하는 방법과 ‘어육류39-해삼전복’에서 전복탕이 유일하게 등장한다.

건복을 이용해 꽃전복(花鰒)을 만드는데, 조선 중기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도문대작(屠門大嚼)에 전복요리 중에 백미라 할 수 있는 꽃전복이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는 ‘대전복은 제주에서 나는 것이 가장 크고, 꽃전복은 경상우도 해상 사람들이 전복을 따서 꽃 모양으로 썰어서 상을 장식하는데 이를 화복이라고 하며 큰 것은 얇게 썰어서 만두를 만드는데 좋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의 숙종 41년(1715년) 9월 4일 자에 ‘제주에서 사는 백성들이 곡식을 옮겨서 진휼하여 구제해 준 데 대해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부로(父老) 4인을 보내 왔는데 토산물인 화복과 인복을 가지고 먼 길을 걸어서 서울에 올라와 주원(厨院)에 바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조엄(趙曮, 1719~1777)이 쓴 ‘해사일기(海槎日記)’에 “비주수(肥州守, 대마도의 고을의 군수)가 관포 1궤를 보내왔으니, 이는 곧 건복인데, 우리나라의 화복과 같은 것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연해에서 받은 삼중(衫重)을 혹 차왜(差倭)에게 대신 주는 일도 있다 하므로, 호행정관(護行正官) 평여민(平如敏)에게 내어 주었더니, ‘우리 조부가 한 번은 뱃길을 가다가 배에 물이 새어들어 와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뻔했는데, 홀연히 생전복이 새는 구멍에 붙어서 살아나게 됐으므로, 그의 자손 되는 자는 이 때문에 전복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고 했다.

정조 20년(1796) 2월 11일 자에 정리소(整理所) 절목(節目)에도 화복이 올라 있다.

이렇듯 화복은 조선 중기 이후 전복을 꽃 모양으로 썰어 잔치상에 올렸다.

화복은 이와 같은 문헌자료 이외에도 조선 중기 문신인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백헌집(白軒集)’, 이해조(李海朝, 1660~1711)의 ‘명암집(鳴巖集)’ 시문에도 등장한다.

헌종 때인 1856년 발행된 ‘정일당잡지(貞一堂雜識)’에 전복찜이 나오지만, 조선 후기인 1854년 충남 부여의 조씨 댁에서 필사해 9대째 혼인하는 딸에게 물려주던 조리서인 ‘윤씨음식법(饌法)’에 화복을 비롯해 ‘전복만두’ ‘전복다식’ ‘전복매화’ 등 다양한 전복요리가 기록돼 있다.

꽃전복이라 불리는 화복은 궁중은 물론 향반가(鄕班家)에서 큰상을 차릴 때 장식용으로 만들어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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