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경남 진주에 가면 ‘갱식(羹食, 갱시기)’이 있고, 거제 일운면에 가면 ‘숭어국찜’이 있으며 경북 울진에 가면 ‘꾹죽’이 있다. ‘꾹죽’은 ‘국죽’의 된 발음이다. 갱식이나 국찜, 국죽은 보통명사가 합쳐져 합성어가 돼 지역 방언으로 굳어진 음식들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쌀 한 톨이 귀했던 보릿고개 시절 배고픔에 허기를 면케 해줬던 애환이 깃든 음식이다. 동해안의 다양한 국죽은 보릿고개 시절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던 선조들의 지혜가 깃든 생명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꾹죽이라도 해 먹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했다.

쌀독에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한 춘궁기(春窮期) 보리가 익어 가면 보리를 베어와 이삭을 가마솥에 들들 볶아대면 마르게 된다. 이를 절구통에 넣어 빻고 들이나 하천 둑에 나가 쑥, 나생이, 꼬따지, 달랭이, 씀바귀 등 봄나물을 뜯어다 나물국죽을 끓이기도 한다. 메좁쌀과 나물을 넣고 끓인 꾹죽은 맛이 없다.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먹기는 하지만 겨우내 꾹죽을 먹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나마 좁쌀을 조금 넣고, 감자, 온갖 산나물, 김치를 넣어서 양을 불린 꾹죽은 죽보다 나물 종류가 많이 들어가서 나물의 향긋함과 김치의 매콤함이 어우러져 씹히는 맛이 있고 감자가 들어가 맛으로나 영양적으로 최고였다.

메밀의 겉껍질을 벗겨 낸 메밀녹쌀이 들어간 국죽은 별미 음식이었다. 메밀을 많이 재배한 정선이나 평창, 영월, 삼척 하장, 강릉 왕산 등 산중에서 주로 메밀국죽을 많이 해 먹었다. 메밀국죽은 된장을 넣어 끓였기 때문에 얼큰하고 구수하다. 특히 메밀녹쌀을 씹으면 톡톡 튀는 느낌과 잘근잘근 씹히는 느낌이 있어 식감이 기가 막히다. 메밀쌀의 특성 때문에 푹 끓여도 퍼지지 않는다.

일부 산간지방에서는 봄에 꽃이 피면 아카시꽃이나 감꽃을 따다가 ‘꽃죽’을 끓여 먹었다. 꽃죽은 밀가루나 콩가루를 무친 뒤 끓는 물에 넣어 죽처럼 끓인 것이다. 이렇듯 산간농촌마을에서는 주로 좁쌀이나 쌀에 나물을 넣어 끓인 반면, 바닷가 마을에서는 좁쌀에 미역이나 생선을 넣어 꾹죽을 끓여 먹었다.

봄철에 곡식 한 줌으로 밥을 지으면 서너 명밖에 먹을 수 없었지만, 곡식 한 줌에 산과 들에 나는 나물을 넣고 국죽을 끓이거나 비록 겨울이라 해도 지난해에 산으로 들로 다니며 장만해 놓은 묵나물이나 어쩌다 어렵게 장만한 생선을 넣고 물을 넉넉하게 부어 끓인 꾹죽은 적어도 열명 정도는 허기를 때울 수 있는, 온 식구의 배를 채울 수 있는 끼니로 충분했다.

특히 쌀 또는 조 등이 부족할 때 해안에서는 많은 양의 산나물과 때로는 꽁치, 양미리, 이면수 등 생선을 넣어서 양을 불려 먹는 것이다. 주로 식량이 부족한 겨울철에 많이 먹었지만 가정에 따라서는 곡식이 모자랄 때 수시로 해 먹는 음식이었다.

꾹죽에는 좁쌀과 감자를 5:5 비율로 넣고 여기에 산나물 또는 생선, 미역 등을 넣는다. 모든 재료를 함께 넣은 후 끓이는데, 생선의 경우 내장을 제거한 뒤 큼직하게 썰어 대가리까지 함께 넣는다.

‘꽁치 꾹죽’은 묵나물을 데친 뒤 꽁치를 썰어 넣고 된장을 넣은 뒤 비벼준다. 그리고 죽을 끓여 거기에 비빈 것을 넣고 콩나물과 국수를 넣어 걸쭉하게 끓인다.

울진에는 ‘꾹죽 없이는 다 죽었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꾹죽은 춘궁기의 한끼 식사를 책임지는 중요한 일상식이었다. 오늘날에는 가정에서 별미로 꾹죽을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겨울 또는 춘궁기에 가장 먹기 싫은 음식 중 하나이기도 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