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맵고 단 맛이 나는 나물이라는 신감채(辛甘菜)를 승검초라고도 부른다. 학명은 ‘Ostericum grosseserratum’. 묏미나리속은 과거 당귀속(Angelica)에 포함돼 있다가 독립했다. 속명 ‘Ostericum’은 그리스어 ‘hysterikos’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서양에선 이 속의 식물이 히스테리를 다스리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신감채의 중국명은 다치산친(大齿山芹)이다. ‘큰 결각이 있는 멧미나리(묏미나리)’라는 의미인 듯한데, 별칭이 많다. 그중에는 조선당귀(朝鲜当归), 조선독활(朝鲜独活), 조선강활(朝鲜羌活), 신감채(辛甘菜)도 있다. 당귀, 독활, 강활이 모두 등장하는 게 흥미롭다.

신감채의 꽃말은 ‘연정’이다. ‘승엄초불휘’는 승검초의 뿌리 즉 당귀(當歸)를 말한다. 여기서 불휘는 ‘뿌리’의 옛말이다.

이 당귀를 고려 때의 이두향명으로는 목귀초(目貴草)·당적(當赤)이라고 했다.

조선 중종 때 문신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은 ‘용재집(容齋集)’ 제8권 화주문공남악창수집(和朱文公南岳唱酬集)에서 신감채 맛을 극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雪盡階庭人不到(설진계정인부도) 눈 녹은 섬돌에 사람 자취 없는데/ 羅生新菜雜苞方(라생신채잡포방) 햇나물이 여기 저기 새싹을 틔우누나/ 辛甘獨擅天然味(신감독천천연미) 신감채가 홀로 천연한 맛 제일이라/ 不用鹽梅煮作湯(불용염매자작탕) 소금과 매실 아니 쓰고도 국을 끓인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문신이며 시인이었던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감채란 당귀 줄기로 역시 용문산에서 난다. 늦봄에 저절로 돋는 것도 절여서 먹거나 부쳐 먹을 만하지만 한겨울 토실 속에서 불을 때서 키운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경기도의 여섯 고을이 입춘일에 신감채를 바치는데 여기 고을도 그중 하나다. 해마다 10월이면 산 아래 백성들은 한 집에 35본(本)씩을 들이는데, 무신년(1788, 정조12)에 들인 것을 계산해 보니 5565본이었다. 입춘이 되기 50일 전에 토실을 만들고 거기다 씨를 뿌려, 하루에 숯 서너 되 정도를 은은하게 때다가 점점 싹이 나는 것을 보아서 차차 숯의 양을 더해 준다. 입춘 4, 5일 전이면 빗살처럼 가지런히 올라오는데 은비녀같이 하얀 빛을 띤다. 베어서 보드라운 종이로 싸고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신감채 네 상자를 감봉(監封)한다. 포장하고 남은 것을 가져다 꿀에 찍어 맛보면 그 향미가 비할 데 없이 좋다.’

‘경도잡지’와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경기도 산골지방(畿峽)의 육읍(양근, 지평, 포천, 가평, 삭녕, 연천)에서는 총아(葱芽, 움파)·산개(山芥, 멧갓)·신감채(辛甘菜, 승검초) 등 햇나물을 눈 밑에서 캐내어 임금께 진상한다. 궁중에서는 이것으로 오신반(五辛盤, 다섯 가지의 자극성이 있는 나물로 만든 음식)을 장만해 수라상에 올렸다”고 한다. 오신반은 겨자와 함께 무치는 생채요리로 엄동(嚴冬)을 지내는 동안 결핍됐던 신선한 채소의 맛을 보게 한 것이다.

민간에서도 파, 겨자, 당귀 등의 어린 싹으로 입춘채(立春菜)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강원도 홍천 지역에서 집안 행사가 있는 날이나 특별한 날 만들어 먹는 떡이다. 이른 봄 채소가 아직 자라기 전에 당귀 고유의 은은한 향이 나는 떡을 먹으면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승검초입떡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쌀을 물에 충분히 불려서 소금을 넣고 빻아 체에 내린다. 가루로 준비할 경우에는 멥쌀가루로 준비한다. 멥쌀가루에 단맛을 내기 위해 설탕을 골고루 섞고, 팥은 푹 삶아 건져 준비한다. 쌀가루에 승검초잎을 잘게 잘라 넣고, 팥도 함께 혼합한다. 시루에 젖은 보자기를 깔고, 쌀가루를 평평하게 깔아 떡을 안친다. 익은 것은 젓가락으로 확인한다. 젓가락으로 떡을 찔렀을 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으면 다 익은 것이다. 익은 후 김이 나가면 비로소 맛있는 떡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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