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성토의 장 된 유엔총회
“여러 제안에도 합의 어려워”
강대국 중심·무력 조항 문제

[뉴욕=AP/뉴시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9월 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 장관급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책임과 안보리에서의 거부권 행사로 안보리 기능이 무력화된 점을 비판하며 유엔 개혁을 촉구했다.
[뉴욕=AP/뉴시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9월 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 장관급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책임과 안보리에서의 거부권 행사로 안보리 기능이 무력화된 점을 비판하며 유엔 개혁을 촉구했다.

[천지일보=이솜 기자] 국제연합(유엔)이 기구 창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세계평화 유지’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쇠퇴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쟁을 막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유엔을 설립하고 규칙을 정한 강대국들이다. 냉전 종식 후 중국을 제외한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 4개국은 유엔의 승인 없이 7개 국가(파나마, 세르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조지아,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우크라이나부터 이스라엘까지 최근 국제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막지 못한 국제연맹이 이후 해체된 것처럼 러시아의 침공이 유엔 종말의 기폭제였을까.

국제연합의 날을 2주 앞둔 지금, 세계는 유엔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다.

◆또, 또, 또 전쟁… 유엔 개혁론 최고조

“저는 총회에 제출된 의제가 단순히 이탈리아 침략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이는 집단 안보-국제연맹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1936년 6월 30일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장에서 나온 호소다.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당시 국제사회를 향해 8개월 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침공으로 황폐해진 자국의 현실을 알렸다. 셀라시에 황제의 경고에도 국제연맹 회원국들은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를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었던 이탈리아는 이 기회를 이용해 연맹을 아예 탈퇴했다.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의 침략을 막지 못한데다 대응도 무력했고, 이는 기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결국 셀라시에 황제의 호소가 있은 지 3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이탈리아 침략은 불안한 국제 정세를 형성하고 1938년 뮌헨 협정과 함께 나치 독일의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도전의 여지’가 있다는 신호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평화를 위해 설립된 국제연맹이 아이러니하게도 새 전쟁 발발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긴 채 마무리되며 승전국들은 다시 국제기구인 국제연합(유엔)을 설립했다. 그리고 86년 후인 작년 4월 5일, 미국 뉴욕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장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같이 경고했다.

“우리는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살인권으로 바꾸는 국가(러시아)를 상대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안보 전체의 구조를 훼손한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유엔은 해산될 수 있다.”

셀라시에 황제와 같은 호소였다. 역사는 반복될까.

◆빈 회의부터 실패한 세계 집단 안보

국제 집단 안보의 기원은 1814~1815년 빈 회의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사후 수습을 위해 빈에서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개최된 국제회의다.

당시 생소한 개념이었던 ‘집단 안보’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강대국들이 또 다른 유럽 패권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규칙과 가치 등으로 힘의 균형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표는 전쟁 종식이나 예방이 아니었다. 전쟁의 대상과 영향을 제한하는 데 있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첫 번째 집단 안보 기구는 실패로 끝났다.

이어 유럽을 초월한 새 국제기구인 국제연맹은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집단적 안보 체제 구축에 비참하게 실패했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전 대통령은 미국, 소련, 영국, 중국 등 4대 강국이 세계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봤다. 여기에 프랑스가 추가되며 5대 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 유엔 안보리의 형태가 갖춰졌다.

현재 유엔의 홈페이지에는 안보리가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소개돼 있다.

지금의 유엔, 특히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안보리가 변화를 꾀하지 못한다면 결국 국제연맹과 같은 운명을 겪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이런 성토가 주를 이뤘다. 유엔의 최고 기구인 안보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비난이었다. 유엔 역시 안보리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안보리는 더 이상 안보 우산이 아니라 5대 강대국 분쟁의 장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안보리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지적이 나오지만 결국 모든 문제는 5대 상임이사국으로 귀결되는 양상이다. 상임이사국들의 깊은 분열은 우크라이나에서 시리아, 말리, 미얀마, 남수단, 북한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치명적인 분쟁과 인권 침해, 핵 위협을 막기 위한 공동 행동을 가로막고 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도 앞서 이를 경고한 바 있다. “국제연맹은 연맹을 탄생시킨 국가들이 그 원칙을 버렸기 때문에, 즉 국가들의 정부가 현실을 직시하고 시간이 남은 동안 행동하기를 두려워했기에 실패했다.”

ⓒ천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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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어떤 수준 넘어선 변화 필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안보리 변화의 필요성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다.

이번 유엔총회에 참석한 대표단과 세계 지도자들이 유엔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못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세상이 변했으니 유엔도 변할 수 있을까? 꿈도 꾸지 말라’라는 기사를 통해 “세계 지도자, 외교관, 유엔 관리들에 따르면 안보리 개정을 위한 여러 제안과 아이디어가 떠돌고 있지만 필요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안보리에) ‘중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어떤 개선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가진 체제를 진정으로 바꾸려면 현재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합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시급한 개혁은 상임이사국 체제다. 상임이사국들도 변화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5개국 모두 어떤 유형의 변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어떤 나라도 소위 ‘절대반지’인 비토권(거부권)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나마 안보리 개혁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상임이사국 수를 늘리자는 제안도 현실 가능성이 희박하다. 리처드 고완 국제위기그룹 유엔 국장은 NYT에 “상임이사국을 원하는 모든 국가에는 이를 막으려는 나라가 하나 이상 있다”며 “이탈리아는 독일을, 파키스탄은 인도를, 중국은 일본을 막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개편안에 따른 유엔 헌장을 변경하는 과정도 큰 장애물이다. 193개 전체 회원국의 3분의 2의 찬성과 5개 상임이사국 모두의 승인이 필요하며, 이를 통과해도 회원국 3분의 2가 각국의 헌법 절차에 따라 개선안을 비준받아야 한다. 역대로 안보리 구성이 1965년과 1971년 딱 2차례만 바뀐 이유다.

그런데 어렵사리 안보리 개편안이 통과돼 상임이사국이 늘거나 바뀐다 해도 의문은 여전하다.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까.

◆한국 내년부터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상임이사국 체제가 대대적으로 개편된다 해도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여전하다.

고완 국장은 “안보리의 신뢰성 문제는 회원국 변경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회복될 수 있으며, 집단행동이 더 쉬워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 강대국 간의 분열과 긴장이 계속된다면 새롭고 확장된 안보리도 마찬가지로 마비가 될 수 있다”며 “이것은 단순한 수학 게임이 아니다. 기대치를 너무 높여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유엔 헌장 역시 애초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유엔 회원국은 자국 또는 자국의 연합에 대한 무력한 공격을 받을 경우 자위할 권리를 가진다. 유엔평화유지군 역시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

결국 패권 싸움을 쉬지 않는 강대국이 논의를 주도하는 구조와 전쟁 허용에 예외를 둔 조항이 안보리 개혁의 핵심이 돼야 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미들파워’의 역할과 함께 전쟁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확실한 국제법도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마침 한국이 내년부터 2년간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임기를 시작한다.

한국에 본부가 있는 유엔 등록 국제평화단체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의 ‘지구촌 전쟁종식 평화 선언문(DPCW)’ 10조38항도 세계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DPCW는 특정 국가의 이익을 배제하고 각각의 조항은 전쟁의 완전한 종식을 목표로 기존 국제법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침략과 전쟁의 결과를 어느 나라보다 뼈저리게 아는 한국의 기지가 가까운 미래에 발휘될 수 있을까. 세계평화를 소원하는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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