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유희춘(柳希春)은 마침내 19년에 이르는 유배생활(流配生活)을 마치고 다시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면서 성균관 직강 겸 지제교(成均館直講兼知製敎)에 제수(除授)되었으니 다시 조정(朝廷)에 출사(出仕)하게 되었다.

그 이후 대사성(大司成)을 비롯해 부제학(副提學),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등의 요직(要職)을 거쳐 1575(선조 8)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그런데 유희춘은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落鄕)을 한 이후 1577(선조 10)년 서울에서 향년(享年) 65세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하였다.

이상과 같이 허준(許浚)이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희춘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했는데 특히 미암(眉巖)은 후세에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비롯해 속휘변(續諱辨), 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시서석의(詩書釋義), 헌근록(獻芹錄), 역대요록(歷代要錄), 강목고이(綱目考異), 속몽구(續蒙求) 등의 많은 저서(著書)들을 남겼다.

이와 관련해 유희춘의 대표적인 저서라 할 수 있는 미암일기에 허준과 관련된 기록이 38회나 등장한다는 점인데, 내용 중의 일부에 허준이 유희춘에게 서책(書冊)을 선물로 보냈다는 대목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대목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568(선조 1)년 2월 20일 ‘미암일기’에 “허준이 ‘노자(老子)’, ‘문칙(文則)’, ‘조화론(造化論)’의 세 책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해 4월 20일에도 “허준이 좌전(左傳) 10책과 당본(唐本) ‘모씨시(毛氏詩)’를 보내왔다”는 것인데, 이를 통하여 볼 때 당시 허준의 학문적인 수준도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1571(선조 4)년 허준의 관직(官職)이 내의원(內醫院) 종4품 첨정(僉正)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며, 2년후인 1573(선조 6)년에 정3품 내의원정(內醫院正)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조실록(宣祖實錄)에 기재된 허준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을 소개한다.

<선조실록 9권, 선조 8년 2월 15일 갑신 3번째기사 1575년 명 만력(萬曆) 3년>

“명의(名醫) 안광익(安光翼)·허준(許浚)이 들어가서 상의 맥(脈)을 진찰하고는, 상이 전에 비해 더 수척하고 비위의 맥이 매우 약하며 또 번열(煩熱)이 많아 찬 음식 드시기를 좋아하고 문을 열어 놓고 바람을 들어오게 한다고 하였다.”

허준은 1581(선조 14)년 한의학(韓醫學)의 기초가 되는 ‘맥경(脈經)’을 왕명(王命)에 의하여 직접 교정(校正)하고 이를 간행(刊行)함으로써 내의원 생활에 새로운 전기(轉機)가 마련되었다.

이와 관련해 ‘맥경(脈經)’은 의학(醫學)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기본서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이었는데, 이를 허준이 직접 정리하면서 허준의 내의원 내 위치는 점차 상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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