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강화군 교동면서 출생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발령
점자 개발 후 총독부에 편지
암자 소나무 같은 그의 성품
손자도 조부 닮아 장애인 愛
“100주년 성대하게 치렀으면”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 입구에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 눈먼 사람들을 위하여 점자가 있으니 이것을 통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는 박두성의 명언이 적혀있다. ⓒ천지일보 2023.08.30.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 입구에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 눈먼 사람들을 위하여 점자가 있으니 이것을 통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는 박두성의 명언이 적혀있다. ⓒ천지일보 2023.08.30.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시각장애인이 일반 사회에 나가서 교수, 판사, 국회의원도 되는 건 점자가 있기 때문이죠. 점자는 시각장애인의 인생을 완전히 거듭나게 합니다.”

지난 25일 ‘송암 박두성 60주기 추모식’이 열리는 서울맹학교. 이곳에서 36년간 교사로 근무한 양회성씨는 “박두성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오늘날 저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이 교육받고 직업을 갖고 비시각장애인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양씨는 13세 때 축구를 하다가 눈을 다쳐서 시력을 잃었다. 처음엔 실명하면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다. 그러다 맹학교에 와서 점자를 배웠다. 처음 점자에 손끝을 댔을 때의 느낌은 마치 거울에 뿌려놓은 모래알을 만지는 것 같았다. 이게 글자인가 싶었다. 점자를 익혀서 생각을 쓰고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자 캄캄한 바다에서 등불 하나를 발견한 듯한 심정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에게 점자는 일반인에게 글자 그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 ⓒ천지일보 2023.08.30.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 ⓒ천지일보 2023.08.30.

한글점자를 창안한 송암 박두성의 노력은 곳곳에서 결실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교사가 점자교과서를 손끝으로 읽어내리며 학생을 가르치고, 시각장애인 의원이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에 나서고, 시각장애인 변호사가 탄생하는 건 한글점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송암 박두성은 1926년 11월 4일 한글점자를 반포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에게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다. 그가 개발한 한글점자는 ‘훈맹정음’이라 불린다. 시각장애인을 사랑하는 박두성의 마음이 훈맹정음에 담겨있다. 3년 뒤인 2026년은 한글점자 반포 100주년을 맞는 해다. 천지일보는 지난 17일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에서 박두성의 손자 박현재씨를 만나 그의 생전 이야기를 들어봤다.

◆제생원 맹아부에 발령받기까지

송암 박두성은 1888년 4월 26일 인천 강화군 교동면에서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두성은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권유로 14세에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어의동보통학교에서 8년간 교편을 잡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열심히 해서 서울 경기고등학교나 어쩌면 서울대학교 교수까지 해서 서울대 총장이 됐다면 내가 좋잖아요? 왜 하필 장애인학교(제생원)에 가서…. 기가 막힌 거죠.”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송암 박두성의 손자 박현재씨가 지난 17일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박두성 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8.30.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송암 박두성의 손자 박현재씨가 지난 17일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8.30.

박두성은 1913년 1월 6일 조선총독부 제생원 맹아부로 발령받았다. 이곳에서 시각장애 아동과의 운명 같은 만남이 시작됐다.

◆조선총독부에 보낸 편지 한 통

박두성은 당시 시각장애인 교육이 청각과 주입식 교육 위주로 진행되던 걸 보며 점자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이종덕, 전태환 등 8명과 함께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비밀리에 조직해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글점자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은 저녁마다 박두성의 집에 모여 불을 끄고 점자 개발에 매진했다.

7년여간의 노력 끝에 1926년 8월 한글점자가 완성됐다. 박두성은 조선총독부에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한글점자를 만들어서 반포하려고 하니 허가해 달란 내용이었다.

“전부 일본어를 하고 한글은 못 쓰던 시대에 한글점자를 반포하겠다니 죽기를 자처하는 거였죠. (일본 순사가)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같이 모인 사람들을 몽땅 다 잡아갈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됐다면 우리 집은 쑥대밭이 됐을 겁니다. 그때 당시 종로경찰서에 공문서가 안 갔다는 건 우리 집 기적 중 기적입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송암 박두성의 손자 박현재씨가 지난 17일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씨의 뒤에는 박두성이 제판기를 치고 옆에서 부인과 딸이 각각 성경을 읽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 ⓒ천지일보 2023.08.30.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송암 박두성의 손자 박현재씨가 지난 17일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씨의 뒤에는 박두성이 제판기를 치고 옆에서 부인과 딸이 각각 성경을 읽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 ⓒ천지일보 2023.08.30.

기념관에는 박두성이 제판기를 치고 옆에서 부인과 딸이 각각 성경을 읽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 기독교 신자였던 박두성은 1931년 성경의 점자 원판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41년 신약성경 점자판을 완성했으나 6.25 전쟁 중 소실됐다. 1954년 성경 점역에 다시 착수해 1957년 성경전서 점역을 완성했다.

◆오직 시각장애인 생각뿐

“할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한글점자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셨습니다. 손자가 몇 살이 됐으니까 장가보내고 그런 데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지요.”

박두성의 관심사는 온통 시각장애인에게 맞춰있었다. 앞만 보지 못할 뿐 두뇌나 다른 신체에 이상이 없는 시각장애인을 ‘산송장’이 되게 할 순 없었다. ‘능한 목수는 상한 나무를 버리지 않고 잘 쓴다’는 게 박두성의 교육 이념이었다.

점자 개발과 함께 박두성의 큰 고민 중 하나는 시각장애인의 생업 문제였다. 당시 시각장애인이 주로 하던 일은 안마와 점술이었다. 박현재씨는 어린 시절 인천 자유공원에서 할아버지 집에 자주 오던 시각장애인 세 명이 뙤약볕에 앉아 점치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이 모습에 화가 나 할아버지에게 고하자, 박두성은 “그래 장애인에게 마땅한 생업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시각장애인들이 뭘 해야 먹고 살겠는지 너도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박두성은 시각장애인들에게도 “점을 치더라도 공부해서 제대로 치라”고 호통쳤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 ⓒ천지일보 2023.08.30.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 ⓒ천지일보 2023.08.30.

◆굽히지 않는 올곧은 성품

박두성의 호 ‘송암(松庵)’은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란 뜻에서 지어줬다. 박두성은 그에게 붙여진 이름대로 옳은 일에 굽히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가정 교육에서도 나타났다.

박현재씨가 중학생이 되던 해였다. 박두성은 이제 집안일을 한두 가지 도와야 한다며 그에게 마당 쓰는 일을 시켰다. 당시 박두성의 집 마당은 교실 3개를 합쳐놓은 것만큼 널찍했다. 박씨는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매일 아침 마당을 쓸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 그는 할아버지에게 “고3은 한 시간 일찍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등교 시간을 핑계로 마당 쓸기를 그만두게 되길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두성은 “그러면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마당 쓸고 가라”고 말했다.

◆대문에 태극기 그려진 집

박두성의 집에는 언제나 시각장애인이 함께했다. 그의 집 대문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 집 대문은 덕수궁 문처럼 웬만한 집 대문보다 컸습니다. 가운데에는 태극기를 커다랗게 그려놨어요. 그건 우리 집이 나라를 사랑하는 가정이라는 걸 자랑하려고 한 게 아니라 시각장애인들이 할아버지 집을 찾아갈 때 ‘태극기 그린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어서 찾아오라는 할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박두성의 생일날이 되면 그의 집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아침에는 교회 목사, 점심에는 일가친척이 방문했다. 저녁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찾아와 일반 집 마루보다 두 배 정도 넓은 마루가 꽉 차도록 앉았다. 박두성의 아내는 식사할 때마다 ‘오늘은 반찬이 뭐가 있다. 오른쪽에는 무슨 반찬이 있고 왼쪽에는 무슨 반찬이 있다. 가운데는 불고기가 있다’고 세세하게 일러줬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 송암 박두성 기념관에 제판기가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 2023.08.30.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 송암 박두성 기념관에 제판기가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 2023.08.30.

◆“세종문화회관서 기념식 열고파”

박현재씨는 할아버지의 ‘애맹정신’을 빼닮았다. 10여년 전 인천장애인체육회에서 사무처장을 할 때였다. 그는 장애청소년수영대회를 개최하면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나누지 않고 참가자 수만큼 금메달을 만들었다. 시각장애든 어떤 장애가 있든 간에 스포츠를 즐기는 게 중요하지 메달 색깔을 나눈다는 자체가 그에겐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박씨는 모든 참가자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줬다. 그는 “장애인 선수들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내 얼굴을 꼬집고 덤벼들고 난리였다”며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그의 할아버지 박두성이 점자를 개발한 지 100년 가까이 흘렀다. 박씨는 한글점자의 날 100주년 기념식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 ⓒ천지일보 2023.08.30.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 박두성 기념관. ⓒ천지일보 2023.08.30.

“한글날이 되면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르는데 한글점자는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요. 한글점자는 한글을 연구하고 검토하고 모방해서 만든 제2의 한글입니다. 한글점자의 날 100주년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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