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울지경덕은 당태종 이세민의 경호대장으로 이름은 공(恭)이다. 논란은 있지만 성으로 미루어 선비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젊어서 대장장이로 생업으로 삼다가 수말의 반란군에 가담했다. 나중에 이세민에게 항복하여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했다. 이부상서 당검(唐儉)과 태종 이세민이 바둑을 두다가 언쟁이 벌어졌다. 화가 난 이세민이 당검을 담주(譚州)로 유배시켰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울지공에게 “당검이 나를 무시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대가 증인이 되어 주시오.” 울지공이 응답했다. 다음날 조회에서 울지공이 머리를 찧으며 신은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물어도 바뀌지 않았다. 화가 난 이세민이 나가버렸다. 얼마 후 3품 이상 관리들을 초대한 잔치에서 이세민이 말했다. “경덕에게는 3가지 좋은 점이 있다. 당검은 죽을 지경에서 살았고, 짐은 실수로 화를 내고도 아름다운 명예를 얻었으며, 자신은 충직하다는 명예를 얻었다.” 울지공은 1천필의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이세민이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으라고 권하자 울지공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했다. “신의 아내는 미천하지만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왔습니다. 저는 배운 것이 없지만 부귀해진 후에는 아내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세민도 생각을 바꾸었다.

수왕조 말기에 태원에 사는 서생이 있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글을 가르쳐서 먹고 살았다. 그의 집은 관청의 창고와 가까웠다. 어느 날 창고를 열어보았더니 수만 관의 돈이 있었다. 그가 참지 못하고 돈을 움켜쥐자 금갑을 입은 사람이 창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울지공에게 부탁하시오. 이 돈은 울지공의 것이오.” 서생이 아무리 찾아도 울지공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철공소에 들렀다가 윗옷을 벗고 철을 두드리는 울지공을 만났다. 서생은 그가 쉴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했다. 울지공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서생이 말했다. “저의 집은 매우 가난하고, 당신은 부귀합니다. 5백관의 돈이 필요하니 주실 수 없겠습니까?” 울지공은 대장장이로 보고 부귀하다고 놀리느냐고 화를 냈다. 서생이 말했다. “나를 불쌍히 여긴다면 빌려주라는 몇 글자만 적어 주십시오. 이후에 무슨 일인지 알 것입니다.” 울지공은 서생의 말대로 ‘오늘 누구에게 5백관을 맡긴다’는 글을 적어주고 서명까지 했다. 서생은 고맙다고 절을 한 후 그것을 들고 가버렸다. 울지공과 일꾼들은 크게 웃으며 황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창고로 돌아온 서생이 금갑을 입은 사람에게 울지공의 글을 주자 웃으면서 5백관을 주었다. 나중에 울지공이 태종를 보좌하여 큰 공을 세우고 귀향할 때 이세민은 재물이 가득한 창고를 주었다. 창고를 열어 장부와 대조해보니 5백관이 적었다. 창고지기를 징벌하려고 하다가 문득 기둥에 글씨를 적은 종이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자기가 대장장이였을 때 서생에게 적어준 글이었다. 놀란 울지공이 서생을 찾아서 물어보았다. 서생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경덕은 많은 상을 그에게 주고 창고에 있던 재물을 모두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울지공은 당초의 이세민에게 투항한 후 진숙보(秦叔寶)와 함께 뛰어난 무예로 여러 차례 이세민을 위기에서 구했다. 특히 현무문의 사변에서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이세민의 생명을 구했다. 탁월한 정치적 식견까지 겸비한 그는 현무문의 사변 이후에 태자 이건성(李建成)의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주장하여 내부의 모순을 신속하게 완화시켰다. 동량지재인 위징(魏徵)이 이건성의 사람이었으나 살아남아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던 것은 울지공 덕분이었다. 울지공이 없었다면 이세민도 없었을 것이고, 나중에 대당성세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순박하고 충후한 성품이었던 울지공은 이세민에게 귀부한 이래 오로지 한마음으로 충성을 다했다. 공주를 아내로 삼으라는 이세민의 권유를 거절한 것은 더욱 고귀한 품성으로 각인되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를 문신(門神)으로 받들었다. 공을 믿고 자부심이 지나쳤던 단점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만큼 순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정관 17년(643), 태종이 능연각에 대당제국을 건설한 24명의 공신도를 그려서 비치하라고 명했다. 울지공은 7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군주의 앞에서도 아첨하지 않고 당당했던 사람이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