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국가나 조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제갈량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당파를 결성하여 충직하고 유능한 사람을 모함하는 자라고 했다. 물론 당파는 경쟁과 견제를 통해 권력집중을 막고 적절한 대안을 추구한다는 순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략적 목표나 전술적 방법론이 결정되면 당파는 비효율적인 역기능으로 작용한다. 특히 군대는 고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명령과 복종이 기본 축이다. 어떤 조직이거나 의사결정까지는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 하지만, 결정된 후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지나침이 문제이지 적당하면 약이다. 적당의 기준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리더의 필수적인 능력이다.

시간적, 공간적 상황과 가치판단에 따라 인간의 사상과 행동양식이 달라지므로 붕당은 인류사회의 필연적 현상이다. 붕당의 형성을 무조건 막고 제어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다른 형태로 폭발한다. 따라서 사회와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는 건전한 방향으로 육성해야 한다. 구양수도 붕당의 생성은 자연적 이치이므로 건전한 붕당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제갈량도 붕당 자체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이권을 위해 당파를 지어 이합집산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비방하는 것을 경계했다.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이 당파싸움으로 망했다는 ‘당쟁망국론’을 주장했다.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은 조선인들이 당파싸움으로 국력을 소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증거였다. 대표적 식민사관의 하나인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도 한국 사람은 모래알처럼 뭉치지 못한다고 자기비하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말이다. 일본은 임란 이전에 오랜 내전을 겪었고, 메이지유신 전후에도 살벌한 정치투쟁을 펼쳤다. 조선의 당파싸움은 그들의 내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침탈을 당한 모든 국가가 당파싸움 때문에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규정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단결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치열한 논쟁으로 국론을 결집하기 위해 노력한 정치적 성향이 강한 민족일 뿐이다. 위기가 닥치거나 국가적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특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과 함께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민족 가운데 민족국가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구양수는 군자의 정당은 처음과 끝이 같지만, 소인의 붕당은 이해관계가 소멸되면 곧바로 흩어진다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소인의 붕당이라고 스스로 사사로운 목적으로 결성된 붕당이라고 말할까? 절대로 아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각 정당도 군자의 정당과 소인의 붕당으로 구분할 수가 있을까? 그들도 화려한 수사를 통해 붕당의 명분을 과시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당을 모두 군자의 붕당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당내 후보경선에서 지고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을 만들거나 공천을 받지 못해 다른 정당으로 가버리는 사람들은 구양수의 기준에 따르면 일단은 소인배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받아들인 정당도 소인배들의 붕당이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 국민의 정치적 판단능력은 대단하다. 물론 경쟁의 룰이 불공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도 그가 속한 정당의 몫이라면 감수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이제는 우리 국민의 정치 수준이 경쟁에서 졌다고 뛰쳐나가거나 이적행위를 하는 사람을 선별해낼 정도로 성숙해진 것은 분명하다. 고대 전제정치시대와 달리 현대 대의민주정치에서는 군자의 붕당과 소인의 붕당을 변별하는 책임과 권한이 국민에게 있다. 따라서 국가의 안정과 발전에 대한 책임도 궁극적으로는 국민에게 귀속된다. 민주정치가 최선책이 아니라 차선책을 도출해내는 효율적이지 못한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 국민이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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