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전쟁의 후유증으로 민생은 파탄이 났다. 백성들은 초근목피에 삶을 의존해야 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이 던지는 저주의 돌멩이를 맞으며 도망치듯 떠났던 피난에서 환궁한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일상은 전쟁 전과 본질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시절이 어려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꺼림칙하긴 했겠지만 그것 때문에 지배층으로서 누리는 계층적 특권이 흔들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여전히 백성 위에 군림하며 지배층으로서 삶의 열락을 즐기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다. 따라서 백성은 백성, 그들은 그들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항상 백성만 불행해지는 위화(違和)적인 사회현상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궁중의 피 냄새 풍기는 암투와 갈등, 당파 싸움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도 그것과 결코 무관치가 않다. 이는 하마터면 나라가 망할 뻔한 전쟁마저도 그들을 대오각성케 하거나 달라지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웅변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애꿎은 백성들에 재앙이 미치지만 그들은 오불관언으로 태연히 백성들의 등을 터지게 했다. 이 시대에도 그런 행태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떻든 선조는 1600년 정비 의인왕후 박 씨가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2년 후 51세에 새 장가를 간다. 상대는 19살 꽃 나이의 규슈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이다. 그 여인이 1606년 적통왕자 영창대군을 낳은 인목왕후다. 선조는 평생 서얼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인목왕후의 영창대군 생산은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그것이 필시 집안에 미래의 재앙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근심하기 시작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인목왕후의 어머니인 김제남의 부인이다. 

광해군에게는 시련이 즉시 찾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세자였지만 선조로부터 미운털이 박혀 퍽이나 많은 구박을 받았다. 선조는 아침 문안을 온 광해군에게 ‘명나라의 고명도 없는데 세자 행세하려 말고 아침 문안 그만두어라’하고 말할 정도였다. 광해군은 그런 타박을 잘도 참아 넘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08년 광해군은 급기야 34세의 늦은 나이에 선조의 뒤를 이어 새 임금이 됐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초가 막심했다. 선조는 심지어 생전에 광해군에서 적자인 어린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고도 했다. 임금의 이런 마음을 읽고서 붕당 북인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영의정 유영경 중심의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찢어지기까지 했었다. 이럴 때 선조는 병이 깊어져 후계의 결정이 급해졌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2살인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봤다. 이래서 선조는 마음에 썩 내키진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광해군에게 임금 자리를 넘긴다는 선위교서를 영의정 유영경에게 남기고 57세로 세상을 떴다.

선조가 숨을 거두자 유영경은 선위교서를 집에 숨겨둔 채 인목왕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섭정을 하도록 설득한다. 그렇지만 인목왕후 역시 그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토록 했다. 이처럼 광해군의 등극은 아슬아슬한 과정과 곡절, 위기를 넘긴 뒤에서야 간신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의 등극은 사람만의 모사(謀事)와 작위, 작용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왕이 된 그는 처음엔 초당파적인 남인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하고 대동법을 실시해 임란으로 파탄 난 민생을 챙기며 불 탄 궁궐을 창건하거나 개보수하는 등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는 곧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恨)을 풀듯 무자비한 피바람을 일으킨다. 예컨대 유영경과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인 임해군, 적통 왕자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그의 모후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패륜까지도 저질렀다. 인목대비의 친정에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안겼다. 뿐만 아니라 대북파의 사주를 받으며 그들과 함께 정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위험한 적들을 숱하게 양산했다. 대신 그들의 관리와 감시는 소홀히 함으로써 인조반정으로 임금 자리를 빼앗기는 빌미를 제공했다.   한편 선조는 출발이 좋았던 임금으로 초심이 유지됐더라면 성군(聖君)이 못 될 것도 없었다. 그는 임금이 되고 나서 훈구 척신들을 몰아내고 사림 세력으로 조정을 채웠다. 이황과 이율곡은 나라의 스승으로 극진히 대우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그때 화를 입은 선비들에게는 신원(伸?)을 베풀었다. 반면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직은 추탈했다. 나아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윤임 유관 등은 죽이고 그때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 윤원형 등은 삭훈했다. 그는 이율곡으로 하여금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천재 시인 매월당 김시습의 전기를 쓰게도 했다, 이는 새로운 기풍의 진작이고 조정과 백성이 함께 안심하고 평안할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문치의 꽃이 활짝 피워지나 했다. 그의 초심은 이렇게 성군을 지향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정의 사림들이 붕당 싸움에 매몰돼 청치가 혼란해지면서 그의 총명도 흐려진다. 더구나 외침(外侵)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던 탓에 왜(倭)가 쳐들어옴으로써 임금의 위엄은 땅에 떨어진다. 그의 초심도 이와 함께 무너졌다. 그는 냉정과 명철을 잃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우국충정을 다 바치던 싸움터의 명장 이순신을 죽이려 했다. 선조는 그것이 끝없이 추락하는 임금과 왕권의 위엄을 세우는 일로 착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라의 기둥뿌리를 뽑아버리거나 부러뜨리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의 조정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순신을 살려야 한다고 목숨 걸고 임금에 간(諫)하는 바른 신하들은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선조는 아마도 이순신을 죽이는 씻지 못할 역사의 죄업을 남겼을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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