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을 막히게 하는 말을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한다. 가령 이런 것이 바로 그 언어도단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나라를 지키다가 심각한 전상(戰傷)을 입었는데도 치료를 자비부담으로 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말문을 막히게 하는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하마터면 그런 일이 있을 뻔했다. 북한군의 지뢰도발로 중상을 입고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한 젊은 용사에게 정부가 치료비를 책임질 수 있는 기간이 최대 3개월이라는 가슴 무너지는 통보가 어느 날 전달됐었다. 법률 규정이 그러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그 같은 통보의 배경으로 덧붙여졌었던 것 같다.

물어보나마나 그 소식을 들은 본인과 그의 가족들은 엄청 황당하고 기가 막혔을 것이 자명하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나라를 지키다가 몸을 다쳐 청춘이 망가졌는데도 자비로 치료하라는 말은 가당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옳은 일을 갖고서라도 개인이 국가에 항변하기에는 너무 무력하다. 그 소식을 들은 국민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들끓고서야 법률 규정을 내세워 압박하던 당국의 태도가 슬슬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대통령이 병원을 찾아 눈물을 글썽이며 그 용사를 위문하면서 치료비를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밝힘으로서 이 언어도단의 소동은 진정될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소동이 가라앉은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소동으로 한 번 상한 국민 마음속의 울화까지 싹 가신 것은 아니다. 법률 규정이라는 것이 가끔은 이렇게 도와줘야 할 사람을 거꾸로 괴롭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터무니없는 규정들이 무사안일하게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처럼 일이 터져 드러날 때마다 국민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더구나 비록 규정이 금지하고 있다 해도 뚫고 나갈 길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당국자들은 여망(輿望)을 거슬러 싸늘하게 규정부터 들이댄다. 그들의 지나친 보신주의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런 불가피성이 있다는 것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가슴이, 국민과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들의 요구에 충분히 가까울 만큼 뜨겁지가 않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위법한 일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국자들은 규정만을 내세웠지 왜 처음부터 대통령과 같은 마인드를 적극적으로 발동하지 못했는가.

우리 국민은 국민개병(皆兵)제 아래에서 병역의 의무를 진다. 안보 없이 나라와 국민의 생존이 있을 수 없고 군비 없이 평화가 있을 수 없기에 병역의 의무는 신성하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젊은 성인들이 군대에 가는 것이 그들이 ‘을’인 국민이어서 ‘갑’인 국가에 끌려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병역의 의무가 군대에 가기 싫은 사람도 가야 하는 무차별적인 의무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내 가족은 물론 국민 모두를 위한 살신성인의 길을 가는 의무다. 그러니까 자발적인 참여의 동기를 우발하기에 추호의 모자람이 없는 의무라 할 수 있다. 직업군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이런 살신성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민주국가의 정부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의 마음으로 중시해야 한다. 독재국가에서는 국민이 그에게 보은할 일이 있건 없건 1인 통치자에 대해 국민의 일방적인 ‘결초보은’이 강요되지만 민주국가의 ‘결초보은’은 이처럼 그와는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 어떻든 전상자의 치료비에 대해 자비 부담을 시키려했던 것은 언어도단이며 그 같은 터무니없는 규정은 빨리 고쳐져야 마땅하다.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진(晉)나라에 위무자(魏武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병이 들자 아들 과(顆)를 불러 자신이 죽거든 자신의 애첩, 그러니까 과의 서모를 친정에 보내 개가할 수 있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런데 그의 병이 깊어져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말이 바뀌어 그녀를 친정에 보내어 개가할 수 있도록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덤에 순장(殉葬)하라고 말한다. 얼마 후 위무자가 죽었다. 그렇지만 아들 과는 위무자의 정신이 멀쩡했을 때의 유언을 택해 서모를 친정에 보내 개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로부터 얼마쯤 세월이 흐른 뒤 과는 장수로 전쟁에 나가 진(秦)의 맹장 두회(杜回)와 승산 없는 싸움을 해야 했다. 그런데 결과는 과가 두회와 그의 부하들을 사로잡는 대승이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그대 서모의 아비 되는 사람이오. 내 딸을 살려주어 그 은혜를 갚고자 두회 발 앞의 풀을 엮어(結草) 그가 그것에 걸려 넘어지게 했소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결초보은’의 고사이며 동시에 4자 성어 ‘결초보은’의 유래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정부와 국민은 전쟁터에서 발생하는 전사상자(戰死傷者)에 대해 이 고사가 말해주는 것과 같은 최대한의 ‘결초보은’을 해야 할 빚을 지게 된다. 최고 선진국들처럼 당연히 그들에 대해 응당하고 합당한 보상과 처우 및 예우가 부여될 때 국가 위기 시에 청년들은 군 입대에 흔쾌히 응하며 국민들 또한 분연히 떨쳐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전사상자에 대한 국가의 ‘결초보은’은 결국 후일 어느 땐가는 국가를 위하고 정부를 위하며 국민을 위한 일로서 다시 보답 받게 되는 그런 일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강한 나라, 평화를 구가하는 나라, 이로써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잠시라도 북의 지뢰도발로 중상을 입은 우리의 젊은 용사를 황당하게 하고 국민을 화나게 했던 그런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을 도리어 괴롭히는 이상한 법 규정들을 일소함으로써 국민이 정부를 더욱 신뢰할 수 있도록 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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