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지난 18일 유엔군 사령부는 주한미군 병사 1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월북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지난 2021년 입대한 트래비스 T. 킹 이병이다. 이번에 월북한 주한미군 병사는 홍대에서 사고를 일으켜 영창까지 다녀온 문제 병사이다. 그리고 행적은 미국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 불법 이탈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관광에 참여해 웃으면서 월북했다는 것으로 여러 의문점이 남는 희한한 월북 사건이다. 미국은 미군 병사의 송환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제 발로 걸어 MDL을 넘어간 그를 데려오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북한에서 송환된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북한으로부터 납치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판문점에서 월북한 군인들은 달랐다. 1962년 주한미군 병사로 월북한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은 죽을 때까지 북한에서 살았으며 그의 자식들은 지금도 북한에서 살고 있다. 만약 이번에 월북한 트래비스 킹 이병도 자진 월북했다는 의사를 고집한다면 북한에 남는 것을 택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아마도 킹 이병은 김 씨 왕조(dynasty of Kim)에서 자신의 이름대로 King(왕)이 되려고 월북했는지 모르나 곧 노예 이상 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미군 병사가 자의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월북한 사례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까지 5건, 어쩌면 6건의 미군 월북 사례가 있다. 알려진 첫 사례는 1962년 5월 월북한 래리 앱셔 일병이다. 같은 해 8월 역시 월북한 제임스 드레스녹 일병은 앱셔는 한국에서 대마초 관련 문제가 있었고, 군법회의에 회부돼 군에서 쫓겨날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드레스녹 자신도 상관의 서명을 흉내 내 외출증을 위조했다가 처벌받게 되자 월북을 선택했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주한미군에 배속된 이래 실의에 빠져 홍등가를 전전했다고 털어놨다.

3년 뒤에는 제리 패리시 상병과 찰스 젠킨스 병장이 월북해 이들과 합류했다. 패리시는 개인적 이유로, 젠킨스는 베트남 전쟁에 차출될 것이 두려워 월북했다고 한다. 북한은 미군 병사들이 서방의 자본주의적 삶을 버리고 사회주의 낙원을 택했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1966년 주북한 소련 대사관을 통해 망명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했고, 결코 북한을 떠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들은 이후 북한 선전영화에서 악역 배우를 맡아 전국적 인지도를 지닌 스타가 됐고, 북한 내 외국어 교육기관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지난 2004년, 월북한 미군 병사 중 유일하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젠킨스는 북한 당국이 자신들에게 감시역을 겸한 ‘여성 요리사’를 배정하고 성관계를 강요했으며 자신이 이를 거부하자 드레스녹을 시켜 수차례 폭력을 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젠킨스는 “그들은 보상과 특혜를 약속하며 규칙을 어긴 사실을 서로 고발하게 했다. 이를 통해 받을 수 있는 건 업무량 감소, 더 나은 배급, 추가 외출 등이었다”고 말했다. 이들 여성 요리사는 불임을 이유로 전 남편과 이혼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8년 앱셔의 요리사가 임신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북한 당국은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서 납치한 여성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젠킨스의 부인인 소가 히토미도 1978년 일본에서 납치된 여성이다. 젠킨스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은 히토미는 2002년 다른 납북 일본인 4명과 함께 귀국했고, 젠킨스도 2년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앱셔와 패리시는 1983년과 1998년 병사했고, 드레스녹도 북한에서 201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정착한 젠킨스는 2017년 노환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우리는 2017년 11월 13일 판문점을 통해 귀순한 오청성 하사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북한 쪽 북방한계선을 출발해 지프차를 몰고 판문점까지 달려와 차를 몰고 귀순하려 했으나 수로에 빠지는 바람에 홀로 뛰어 MDL을 넘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은 무려 100여발 이상의 자동소총을 발사했고 그중 5발이 명중됐으나 그는 대한민국의 우월한 의술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 그는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사회적응에 애를 먹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지금도 국민들은 판문점을 향해 질풍같이 달려오던 오청성 하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유의 땅에서 그의 삶은 온통 장애뿐이었다. 좌파 정부는 그가 부상되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가로막았다. 결국 외국으로 떠나야 했고 거기서 외로움을 달래며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어둠의 공화국 북으로 간 미군 병사와 희망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달려온 오청성 하사, 뭔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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