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약속 이행해야 협상 재개”
연 3200만톤 곡물 수출 막혀
아프리카 등 ‘식량 안보’ 비상
미국 등 “식량 무기화” 비난
아프리카 “유감, 재개해달라”

러시아가 전쟁 중에도 우크라이나 곡물을 안전하게 수출할 수 있도록 보장한 흑해곡물협정을 사실상 종료한다고 17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이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식량을 무기화하는 러시아의 행위는 식량이 절실히 필요한 곳에서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만들고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진은 튀르키예 인근을 지나고 있는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선 (출처: AFP, 연합뉴스)
러시아가 전쟁 중에도 우크라이나 곡물을 안전하게 수출할 수 있도록 보장한 흑해곡물협정을 사실상 종료한다고 17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이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식량을 무기화하는 러시아의 행위는 식량이 절실히 필요한 곳에서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만들고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진은 튀르키예 인근을 지나고 있는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선 (출처: AFP, 연합뉴스)

[천지일보=최혜인 기자]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국제 곡물가 급등의 주범이 될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유엔에서는 즉각 강한 비난의 목소리를 냈고 당장에 식량부족 사태가 가중될 아프리카 각국은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장문의 영문 입장문을 홈페이지에 게시하며 자국 농업 관련 제재를 풀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에 협정이 지켜질 수 없었다며 각국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흑해 이니셔티브’ 곡물협정

러시아는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후 흑해 항로를 봉쇄했다. 이후 지난해 7월 22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협상에서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봉쇄된 흑해 항로의 안전보장과 안전 통로를 통해 양국의 곡물과 비료를 수출하는 데 합의했다. 이른바 ‘흑해 이니셔티브(Black Sea Initiative)’다.

이 협상에서는 세계식량안보를 보장하고 기아의 위협을 줄이며 도움이 필요한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국가를 돕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곡물, 비료도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길과 동시에 러시아 농산물과 비료도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이 패키지는 안토니오 구테헤스 유엔 사무총장의 제안과 주도로 이뤄졌다.

러시아로부터 구체적으로 ▲러시아농업은행 로스셀코즈방크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재연결 ▲농업 기계와 예비 부품 및 서비스 공급 재개 ▲식품·비료의 생산·운송 기업 해외 자산·계좌 동결 해제 ▲비료 수출에 필요한 암모니아 수송관의 우크라이나 구간 재가동 등 5가지가 요구됐으며, 이를 실현하는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됐다. 러시아는 지난해 초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SWIFT에서 퇴출당한 상태다.

이어 지난해 8월 1일 우크라이나 곡물을 실은 라조니(Razoni) 화물선이 협상 타결 후 처음으로 오데사 항구를 출발했다. 당시 협정으로 우크라이나가 재개한 밀 등 농산물 수출량이 전쟁 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했고 세계 곡물 가격도 내렸다. 러시아가 협정 당사자로서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러시아가 중단 결정한 이유

이후 곡물협정은 지난해 11월에도 120일 기한으로 연장됐다. 당초 맺어진 협정은 기한을 120일로 정하고 이후 연장할 수 있도록 해왔다.

우크라 곡물. (출처: 뉴시스)
우크라 곡물. (출처: 뉴시스)

러시아는 기한마다 절차와 시간이 걸리는 합의(약속)가 지켜질 것으로 믿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20일씩 2번, 60일씩 2번 총 4번의 기한이 도래하는 360일 동안 유엔과 우크라이나 측은 이를 전혀 관철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지난 17일 성명에서 “1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합의 이행에 대한 진전은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특히 인도주의적 목표와 달리 우크라이나 농산물들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와 서방국가들을 위해 순전히 상업적으로 거래된 점도 지적했다.

러시아는 흑해곡물협상 타결 뒤 총 3280만톤의 우크라이나 농산물이 수출됐는데 그중 70% 이상(2630만톤)이 유럽 연합(EU)을 포함한 서방국가들로 운송됐다고 본다.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한 에티오피아와 예멘·아프가니스탄·수단·예멘·소말리아는 3% 미만인 92만 2092톤만 받았다고 보고 있다.

이에 러시아 외무부는 “인도주의적인 성격을 잃은 흑해곡물협정의 이행은 무의미하다”며 “본 협정 H항에 명시된 조항에 따라 협정연장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자국 농산물·비료 수출 보장 약속이 이행되고 있지 않다며 연장 불가 가능성을 언급하다가 결국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이 17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커비 조정관은 "러시아의 곡물협정 중단은 식량 부족을 악화하고 전 세계 취약계층을 위험에 빠트린다"라며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종료 선언을 규탄했다. (AP/뉴시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이 17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커비 조정관은 "러시아의 곡물협정 중단은 식량 부족을 악화하고 전 세계 취약계층을 위험에 빠트린다"라며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종료 선언을 규탄했다. (AP/뉴시스)

그러면서 러 외무부 측은 “서방측이 진정으로 협정을 소중히 여긴다면 러시아 비료와 식량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겠다는 약속 이행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면서 “약속과 보장이 아닌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면 러시아는 협상 재개를 고려할 준비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유엔 측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스위프트에서 퇴출당했던 러시아 농업은행의 자회사를 다시 스위프트 결제 시스템에 연결시켜 이 은행의 국제 결제를 지원하겠다는 대안을 제시했으나, 협정 종료를 막지 못했다”며 “제안이 무시된 것이 매우 실망스럽다”고 전했다.

◆곡물 수출 재개 모색하는 서방

러시아가 빠진 흑해곡물협정은 오는 23일 공식적으로 효력을 잃게 된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길이 막히면서 전 세계 식량 안보에 빨간불이 켜졌다. ‘세계의 빵 바구니’라는 별명처럼 우크라이나가 밀·옥수수·보리 등 곡물과 해바라기 씨, 유채 씨 등을 수출하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곡물 생산국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프리카 55개국의 연합체인 아프리카연합(AU)은 러시아의 종료 선언에 따른 흑해곡물협정 중단에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곡물과 비료가 아프리카와 같이 필요한 곳으로 안전하게 다시 이송될 수 있도록 당사자들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고 요구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각)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화상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흑해 곡물협정을 정치적으로 왜곡했다며 러시아의 요구 조건을 서방이 이행하면 협정에 복귀할 것을 시사했다. 푸틴 대통령은 협정 복귀에 필요한 조건을 재차 제시하기도 했다. (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각)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화상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흑해 곡물협정을 정치적으로 왜곡했다며 러시아의 요구 조건을 서방이 이행하면 협정에 복귀할 것을 시사했다. 푸틴 대통령은 협정 복귀에 필요한 조건을 재차 제시하기도 했다. (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과거 흑해 곡물 이니셔티브를 확장했을 때 인내와 관용의 기적을 보여줬다”고 피력했다고 스푸트니크가 이날 전했다. 러시아 국방부도 “20일부터 우크라이나 항구로 항해하는 흑해의 모든 선박을 잠재적인 군용 화물 운송선으로 간주할 것이며, 그런 선박에 게양된 국가의 국기는 키예프 정권 편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그리고 유엔은 러시아를 비판하는 한편 곡물 수출을 재개할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앞서 러시아가 협정 중단을 선언하자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식량을 무기화하는 러시아의 행위는 식량이 절실히 필요한 곳에서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만들고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과 몰도바 영토를 경유, 육로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리아노보스티가 EU 집행위 대변인을 인용해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카린느 장 피에르(Karine Jean-Pierre) 미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우크라이나로 항해하려는 선박에 대한 러시아의 경고 이후 선박이 우크라이나 항구로 계속 이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없다”고 설명했다.

2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이즈마일의 곡물 항구에서 작업자들이 화물선에 곡물을 선적하고 있다. (AP/뉴시스)
2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이즈마일의 곡물 항구에서 작업자들이 화물선에 곡물을 선적하고 있다. (AP/뉴시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