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1950~1960년대 신문에서 체육면은 사회면 한 귀퉁이에 불과했다. 담뱃갑만 한 크기 정도였다. 체육기사는 1~2꼭지 정도 실었다. 체육부가 따로 없었고, 사회부 문교부(현 교육부) 담당이 맡아 기사를 다뤘다.

하지만 당시 기자는 지금보다 훨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재와 같이 실시간으로 뉴스와 정보를 전달하는 SNS가 없던 시절이었던 만큼 신문에 일단 기사가 나면 바로 주목받았다.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신문이 10개도 안 됐던 때, 신문기자들은 정보를 독점하며 전문가로 대우받았다.

지난 24일 향년 88세로 타계한 연병해 대한배구협회 고문(전 서울신문 상무)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기자 출신이었다. 최고령 체육기자 출신인 그는 배구인이 아니면서도 배구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배구가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동메달을 따내는 데 큰 역할을 해내며 한국 배구 황금기를 이끌었던 것이다.

1934년 황해도 신막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 고려대를 나온 뒤 1956년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뉴스통신사, 신문사에서 사회부 기자로 일한 그는 “체육 기자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스포츠 분야를 담당하게 됐다. 서울신문 체육부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75년에는 배구인과 비배구인 간 갈등을 중재할 적격자라는 평가를 받아 배구협회 기획이사를 맡은 것을 계기로 배구 행정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이낙선(1927∼1989) 당시 대한배구협회장과 장기영(1903∼1981) 한국일보 회장(IOC 위원)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합리적인 성품에 추진력이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 회장에게 부탁해서 여러 기업에서 훈련비를 모았고, 이 돈으로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의 동메달을 따는 데 일조했다.

특히 1970년대 미도파, 효성, 태광실업 등 실업 배구팀 창단 붐을 이끌어 냈다. 총무이사, 전무이사를 거쳐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 회장 3명을 보좌했다. 이낙선 회장의 후임인 박경원 배구협회장 때는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나서서 서울신문 사장에 협조 요청 전화를 했을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 조석래 회장 때에는 고인이 부회장을 맡아 배구회관 건립기금 조성에 앞장섰다. 기자 출신의 언론계 인사가 주요 경기 단체 임원을 맡아 활동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에는 서울올림픽진흥공단(현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발간한 ‘이야기 한국체육사’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중앙 일간지 및 스포츠 전문지에서 10년 이상 전문기자로 재직하고 부장급 이상으로 퇴임한 원로 체육기자들과 함께 배구를 비롯해 주요 종목 20여권 이상의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프로배구 출범 이후에도 최근까지 국제경기는 물론 지방 경기까지 찾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대한배구협회가 발간한 ‘한국배구 100년사(1916∼2016)’ 편찬 책임을 맡기도 했다.

30년 이상 고인을 옆에서 지켜본 조용구 배구협회 사무처장은 “시대 변화를 예리하게 읽으면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배구 발전을 위해 조언하려고 한 분이었다”며 “조만간 열릴 대회에 모시려고 22일에 통화를 했고, 23일에는 회장님도 통화를 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이야…”라고 안타까워했다.

해방 이후 혼란기를 거쳐 1960~1970년대 한국스포츠를 선도하던 원로분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어른들이 생존해 있을 때 그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받아 한국 현대사의 자료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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