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벽에서 참수된 후, 성 요한이 에페수스 교회의 수장이 됐다. 얼마 후 그는 복음서를 쓰고 에페수스에서 죽었다. 그는 아야술룩 언덕의 남쪽 자락에 묻혔다. AD 4세기에 그의 무덤 위에 작은 예배당이 세워졌고, 6세기에는 성 요한을 기리는 대성당이 세워졌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는 당시 에페수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기독교가 처한 어려운 환경에서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묵시록적 통찰로 가득하다. 기독교인에게 에페수스는 성 바울, 성 요한,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곳으로 매우 중요한 성지가 됐다. 이곳에 성모 마리아를 모신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고, 기독교의 근본원리를 확립한 제3차 세계 공의회가 이 교회에서 열렸다.

4세기에 에페수스는 항구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배수를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거래의 둔화를 막지 못했다. 8~9세기,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의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에페수스는 힘을 잃었다. 도시는 바다에서 해적의 침략과 육지에서 아랍인의 침략을 받았다.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변 성벽의 길이를 줄였으나, 그것으로 부족해 아야술룩 언덕을 중심으로 도심을 지키기 위한 성벽을 쌓고, 제2의 요새를 건설했다. 716년 겨울, 칼리프 술레이만이 이끄는 아랍 군대가 에페수스를 점령했다. 10~11세기, 도시는 버려졌고, Hagios Theologus라고 부르는 아야술룩산 언덕의 고대 유적만 남았다. 1304년, 투르크인이 처음 에페수스에 도달했다. 도시는 옛 영화를 잃고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로 보였다. 아야술룩 언덕을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는 Ayolinoguiiari의 제후국에 통합됐다. 아야술룩은 다시 모스크, 목욕탕, 종교건물 및 멋진 기념물로 장식돼 효과적으로 재건됐다.

투르크인의 통치하에서도 기독교인들은 한동안 주교를 뒀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인들은 이곳에 무역센터를 설립했다. 터키인들은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새로운 무역항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문화와 상업의 중심은 북쪽 이즈미르로 이동했다. 19세기가 되자 아야술룩은 더 이상 설명할 가치가 없는 마을로 변했다. 이 시기에 건설된 철도는 20세기의 터키와 그리스의 인구 교환 이후 그리스에서 이주한 터키인이 사용했다. 새롭게 발견된 에페수스 유적에 대한 관심 덕분에 관광 붐이 일어났다. 기독교인을 비롯한 한국인들에게는 초기 사도들과 성모의 자취가 남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첫 번째 유적은 Varius 목욕탕이다. 발굴을 통해서도 전체 건물의 윤곽은 드러나지 않았다. 전형적인 로마식 목욕탕과 마찬가지로 냉탕인 frigidarium과 온탕인 calderium으로 구분된다. 벽은 둥근 천장으로 덮인 거대한 석회암 벽돌로 만들었다. 모자이크로 포장된 화장실과 운동 장소는 남쪽에 있다. 운동장은 날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붕을 덮었다. 비문에는 Fravius 황제와 그의 아내가 이곳에 홀을 지었다고 한다. 목욕탕 앞의 넓은 안뜰은 에페수스의 아고라이다. 정사각형 평면의 북쪽에는 Odeon과 바실리카, 남쪽에는 Prytance가 있고 기둥으로 경계선을 만들었다. 땅이 서쪽으로 기울어진 아고라를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 벽을 세웠다. 벽 앞에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된 2개 층의 갤러리가 있었다. 2층은 정원을 향해 열 수 있고, 아래층은 아고라와 직접 연결됐다.

아고라의 중간에는 작은 신전이 있다. 동서 방향으로 이집트의 신 Isis가 세워졌다. 다른 세상에서 두 번째 삶에 대한 희망은 소아시아 다른 도시에서도 채택된 전통 신앙이었다. 에페수스에서 이집트 여신에게 봉헌된 두 번째 신전은 아고라의 상가 근처에 위치한 Serapis 신전이다. 이시스 신전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파괴됐을 때, 도미티아누스 광장을 장식했던 Polypheme라는 조각상들로 대체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건 이후 이집트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기 위해 사원을 파괴한 것으로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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