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파 “현세엔 참스승 없어”
수니파는 ‘현세 지도자’ 갈구
대선에선 수니파 정치학 결실

다문화 수용하려는 에르도안
민족주의 도전 속 리더쉽 시험
종교 넘은 세속주의 회복 숙제

튀르키예 대선 개표 현황. (AFP/연합뉴스)
튀르키예 대선 개표 현황. (AFP/연합뉴스)
편집자주

최근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에서 대선이 치러졌다. 튀르키예는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20년 장기집권하고 있는 나라다. 1차전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현 대통령과 도전자 간 박빙의 승부가 펼쳐졌지만 이변은 없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2차 결선에서 또다시 집권에 성공하면서 30년 초장기 집권의 길을 열게 된 것이다. 비록 졌지만 진보진영이 이례적으로 보수진영과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는 점에서 튀르키예 안팍으로 변화된 민심이 읽힌다. 패배한 진보진영은 앞으로도 정의개발당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공언했다. 이와 관련해 본지는 세쿠페 닷고스타 만소리(Shekoofeh Dadgostar Mansori)가 보내온 글을 번역해 게재한다. 세쿠페 닷고스타는 이란 출신으로 스페인 그라나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유럽과 튀르키예, 이란 등을 오가며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스페인 국적을 보유한 그는 유럽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목인 튀르키예와 중동 지역에 대한 통찰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세쿠페 닷고스타 만소리 칼럼니스트.
세쿠페 닷고스타 만소리 칼럼니스트.

모든 것이 역사를 다시 쓰려는 한 남자의 바람대로 흘러갔다. 집권 당정은 20년 넘게 이어온 선거 승리의 신화를 재현해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대통령은 지금까지 총 12번의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신기록도 세웠다. 역사적인 승리에 너무 기쁜 나머지 튀르키예 최대도시 이스탄불에서 지지자들을 위한 노래까지 불렀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그가 속한 정의개발당(AK)은 이번 대선에서 일각의 예측을 뒤엎고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집권 정의개발당은 의회 총 600석 중 과반인 321석을 차지했다. 이제 튀르키예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지난 20년에 이어 또 다른 5년을 보내고 ‘에르도안 시대’는 선거 이후 더 많은 의미가 부각될 전망이다. 우선 에르도안 대통령 지도부의 새로운 5년 국면에서 튀르키예의 선택이 주목된다.

장애물도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가장 큰 장애물은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적, 지역적 분열상이 극명하게 드러난 점이다. 이는 향후 5년 동안 에르도안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선은 감정적이고 양극화된 양상을 보였다. 공화인민당(CHP)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야권 공동후보는 약 48%의 득표율을 얻어 비록 에르도안에게 아깝게 패배했지만, 앞으로 정의개발당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공언한 상황이다.

◆대선으로 드러난 지역주의

에르도안 대통령과 그의 맞수 클르츠다로울루 대표에 대한 투표율을 분석해 보면 지역주의가 확연히 드러난다. 튀르키예 동부·남동부의 쿠르드 지역과 아나톨리아(Anatolia) 서부 및 남서부 지역에서는 뚜렷하게 반(anti) 에르도안 표가 밀집돼 있다.

종교적·민족적·정치적 성향 모든 측면에서도 이런 에르도안 대통령에 반대 양상이 뚜렷하다. 상당수의 튀르키예 쿠르드족과 세속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사뭇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모두 튀르키예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14일(현지시간) 대선 개표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14일(현지시간) 대선 개표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데올로기는 오스만 제국 체제에서 파생된 ‘이슬람 준(semi) 다문화제국’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외국인과 이민자의 언어·정체성 등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결선투표에서 자신에게 힘을 실어준 세난 오간(Senan Oghan)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첫 투표에서 겨뤘던 오미드 외즈다그(자파당), 클르츠다로울루 대표는 이와 달리 좌우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초대 대통령 뛰어넘은 에르도안

에르도안 대통령은 오스만투르크 군주 당시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이란) 문학에 대해 호의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페르시아어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지 않는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인 그는 공개 연설에서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속담을 자주 사용한다. 반면 그의 정적들은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며 때로 극단적 민족주의와 타협, 이슬람 원칙보다 민족주의를 우선시하도록 압박을 가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920년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이 세운 세속적 원칙에 따라 국가를 종교로부터 분리하는 보수 정치 이념을 따른다. 그는 2014년 대통령의 권위를 강화한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이번 대선에서도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 됐다. 그는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의 재임 기간(1923년~1938년)을 능가하는 20년 이상 통치한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정치지도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00년 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후 터키공화국을 세웠고, ‘케말리즘’으로 알려진 영향력을 확고하게 다졌다. 그러다가 100년 이상 지나 터키공화국에서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의 유산을 이어가기 위한 저명한 경쟁자가 생겼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 이 경쟁자는 튀르키예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에르도아니즘(Erdoganism)’이라는 새로운 정치 영향력을 탄생시켰다.

◆이란과 비교되는 튀르키예

지난 15년 동안 치러진 이란과 튀르키예 선거를 비교해 보면 종교정치 측면에서 몇가지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2018년 선거에서 52.5%를 얻었는데, 이번 2023년 대선에서 얻은 52%의 득표율과 비교하면 0.5%가 줄어들었다. 이 정도 비율은 무시할 만한 수준의 감소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별히 지난 2년 동안 튀르키예를 괴롭힌 가공할 만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려할 때 이 정도 지지율 하락은 오히려 큰 정치적 성과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15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광고판 앞을 한 여성이 지나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30년에 걸친 권위주의 통치를 또다시 연장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개혁 성향의 민주체제로 전환할 것인지를 가리는 튀르키예 대선의 최종 결과는 결국 28일 결선투표를 통해 가려지게 됐다. (AP/뉴시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15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광고판 앞을 한 여성이 지나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30년에 걸친 권위주의 통치를 또다시 연장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개혁 성향의 민주체제로 전환할 것인지를 가리는 튀르키예 대선의 최종 결과는 결국 28일 결선투표를 통해 가려지게 됐다. (AP/뉴시스)

이란은 어떨까. 하산 로하니 전 이란 대통령은 지난 2017년 대선에서 2300만표를 얻었다. 하지만 2021년 선거에서는 로하니와 지적 혈통을 계승하는 압돌나세르 헴마티 후보가 300만표도 얻지 못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로하니 전 대통령 자신이 2021년 선거에 참여했더라도 기껏 700만표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이 통계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튀르키예의 뚜렷하게 상반된 선거 패턴을 보여준다. 튀르키예 유권자들은 투표 행동에서 연속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란인들은 기존 선택을 뒤집는 경향을 보인다. 이 현상은 시아파와 수니파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시아파 교리에서 ‘궁극적인 지도자’는 미지의 미래에 출현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대의 이맘(the Imam of the era)’이다. 이상적인 통치자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란인들이 자신의 처지와 리더십에 대해 끊임없이 불만을 품고 완고한 성격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수니파에서 통치자 또는 칼리프는 현시대에 존재하는 유형의 실체다. 외려 좋은 통치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은 미래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처럼 종교에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어필하는 정치지도자가 많은 지지를 받는 이유다. 결국 수니파 칼리프와 그의 정치적 접근 방식은 실용적이고 적응력이 있는 정치학으로 평가된다.

◆‘에르도아니즘’ 계속 흥행할까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정치적, 철학적 영감을 준 학자는 튀르키예 출신 이슬람 교사인 네십 파질 키사위렉(Necip Fazıl Kısakürek)이다. 그는 약 4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그리스정교회와 동방정교회의 교회였던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 모스크를 이슬람의 뿌리로 되돌리고 이슬람 칼리프의 화려함을 되살리려는 이 철학자의 영향을 받았다.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하는 언론인 예니 샤파크(Yeni Shafaq)은 “네십 파질은 하이데거의 개념에 정통한 철학자이자 저명한 시인이었다”며 “에르도안은 자신이 주도해 만든 정의개발당의 청년 추종자들과 함께 당시 튀르키예 이슬람교도의 존경받는 강사인 그의 강의에 심취했었다”고 최근 언급했다.

수니파 교도들의 종교정치관에 입각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에르도아니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낳았다. 그런 에르도안 대통령은 역설적으로 이번 선거에 대한 각종 정치공학적 분석과 무관하게 변화의 리더십을 요구받고 있다.

국제금융투자 컨설턴트인 텔리머연구소(Telimer Institute) 전문가인 하산 말릭(Hasan Malik)은 “에로도안의 승리는 튀르키예의 국제 투자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국가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고 외환보유액 감소까지 초래한 급격한 금융 위기는 인플레이션을 큰 폭으로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말릭은 그러면서 “유일한 해결책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해방과 그의 경제 전략 변화에 있다”고 제안했다.

튀르키예는 심각한 국내 분열에도 주변국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인 나라로 꼽힌다. 특히 이란인과 아프간인들은 튀르키예 부동산 구입 등 각종 투자에 적극적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개방적 다문화주의의 영향으로 튀르키예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외국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30년 장기집권의 길을 활짝 연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러한 한계점을 이번에는 비로소 극복할 수 있을까. 에르도아니즘이 계속 흥행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스탄불=AP/뉴시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7일(현지시각)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그의 선거 유세에 참석해 환호하고 있다. 오는 14일의 대선을 앞두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의 지지로 '새로운 튀르키예 100년'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고 역설했다.
[이스탄불=AP/뉴시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7일(현지시각)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그의 선거 유세에 참석해 환호하고 있다. 오는 14일의 대선을 앞두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의 지지로 '새로운 튀르키예 100년'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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