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박세채(朴世采)는 1688(숙종 14)년 7월 입성해 희정당에서 숙종(肅宗)에게 5건의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인조(仁祖)의 손자(孫子) 동평군(東平君)의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 임명(任命)에 관한 차자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숙종실록(肅宗實錄)에서 인용한다.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7월 13일 계미 1번째 기사) 지난해 사간원에서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의 일로 논했는데 성명(聖明)께서 즉시 들어주지 않으시고, 대간(臺諫)도 굳게 의견을 주장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는 서로의 실수입니다. 성상의 돌봄이 특별하여 나아가 뵙는 것이 빈번(頻繁)하다고 지적하는 의논이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점차로 성명(聖明)에 미침이 없지 않으니, 만약 특별히 제조(提調)를 파직하여 나아가 뵈옵는 일과 물품 주는 것을 여러 종친들과 균등하게 하신다면 위로 치우치게 소중히 여기는 은혜를 끊고 아래로 넓게 미치는 은혜가 있게 되어 진실로 보전(保全)하는 도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임금이 그 차자(箚子)를 받아 책상 위에 두며 말하기를 “조용하게 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숙종은 박세채의 이러한 차자(箚子)에 대해 노여움을 나타냈으며, 구체적인 조치를 내렸는데 그를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며, 소차(疏箚)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命)을 내렸다.

이어서 남계(南溪)에 대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모든 관직(官職)을 체임(遞任)하고 문인(門人)들의 신변소(身邊疏)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강경한 조치를 내렸다.

이러한 조치를 당한 박세채는 도성(都城)을 떠난 이후 파주에 위치한 고령사(현 보광사)로 향했다는 사실을 그의 문집(文集)에서 확인했다.

이와 관련해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종손(從孫)이 되는 경암(敬庵) 윤동수(尹東洙)의 연보(年譜)와 행장(行狀)에 근거해 경암이 이 시기를 전후해 사찰(寺刹)에서 박세채를 만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남계의 연령(年齡)은 58세이고 경암의 연령은 15세가 되니 43세의 연령 차이가 있었다는 것인데, 어떠한 연유(緣由)로 만남이 성사됐던 것인지 그 내력(來歷)이 궁금하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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