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58세의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와 15세의 경암(敬庵) 윤동수(尹東洙)의 연령 차이가 43세가 되는데 사찰에서 만남이 이루어진 사실 자체가 이례적인 일로 판단된다.

물론 이런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사찰명(寺刹名)과 관련해 단정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나 남계집(南溪集)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근거로 볼 때 현재의 보광사(普光寺)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덧붙이면 1688(숙종 14)년 당시 박세채의 처소(處所)는 파주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남계가 경암과 만난 사찰은 보광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남계집에 의하면 남계가 보광사를 방문한 것이 적어도 두 차례가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경암을 만난 시기는 1688(숙종 14)년 7월부터 남계가 다시 조정에 복귀하는 11월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당시 경암은 15세의 소년에 불과했으나 그 위치는 범상치 않았으니 남계와 깊은 친분이 있었던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종손(從孫)이었다는 사실인데, 경암의 조부는 농은(農隱) 윤추(尹推)였다.

윤동수의 연보(年譜)와 행장(行狀)에 의하면 8세에 윤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했다고 돼 있는데 그렇다면 15세에 박세채를 사찰에서 만난 것이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윤동수가 박세채가 사찰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가는 길에 만났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만남 이후 윤동수가 박세채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지 여부도 주목하고 싶은데,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편 숙종(肅宗)에 의해 도성(都城)을 출입할 수 없게 된 박세채에 대한 엄중한 조치가 해제된 것이 11월이었는데, 그렇다면 남계가 7월에 도성에서 나왔으니 보광사에서 어느 정도 체류했는지 여부도 궁금하게 생각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박세채가 사찰에 머물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평소 불교(佛敎)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는지 여부도 흥미롭게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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