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박세채(朴世采)는 1663(현종 4)년에 서강(西江)에 위치한 현석촌(玄石村)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남계(南溪) 이외의 또 다른 호(號)로 알려진 현석(玄石)이란 호의 유래가 현석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박세채가 현석촌으로 이거한 이듬해에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666(현종 7)년에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1667(현종 8)년 여름에 표류(漂流)해 온 한인(漢人)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보낸 일로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에게 서찰(書札)을 보내어 불가하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1668(현종 9)년 7월, 박세채는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에 올랐으나 상소(上疏)하여 체차(遞差)되었으며 이듬해까지 진선과 장령(掌令)에 두차례씩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673(현종 14)년 3월 박세채가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名)을 지으면서 이를 인용하였다.

그해 8월 박세채는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9월에 숙종(肅宗)의 장인(丈人) 김우명(金佑明)이 청대(請對)하여 양호(楊湖) 민업(閔嶪)의 상(喪)에 손자가 집상(執喪)한 잘못을 지적하니 이 일은 저자(著者)가 송시열과 상의하여 결정하였던 것이라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1674(현종 15)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南人)이 집권(執權)하자 1659(효종 10)년 기해복제(己亥服制) 때에 기년설(諅年說)을 주장한 서인(西人) 측의 여러 신하(臣下)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때 박세채는 대사간(大司諫) 남천한(南天漢)에 의해 맨 먼저 공격을 당하였으며 그 결과 관직(官職)을 삭탈(削奪) 당하고 양근을 비롯하여 지평, 원주, 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 생활(流配生活)을 하였다. 

박세채는 다시 등용되는 1680(숙종 6)년까지 6년 동안 정치가(政治家)가 아닌 학자(學者)로서 학문(學問)에 전념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남계(南溪)는 이 시기에 독서기(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보편(春秋補篇), 심학지결(心學旨訣) 등을 저술(著述)하였다.

이와 관련해 박세채가 저술한 독서기는 ‘소학(小學)’의 원문(原文)과 제가(諸家)의 주석(註釋)에 명확하지 못한 구절을 찾아내어 해석(解釋)한 책으로서 4권 4책으로 구성되었다. 

춘추보편은 박세채가 ‘이정전서(二程全書)’와 주자전서(朱子全書)에서 ‘춘추(春秋)’에 관한 해설(解說)을 뽑아 정리(整理)한 책으로서 3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심학지결은 박세채가 ‘심학(心學)’의 핵심(核心)이 되는 경(敬)에 대하여 고경(古經)이나 선유(先儒)의 글에서 뽑아 엮은 책으로서 2권 1책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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