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서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예서로 손꼽히는 작품이 충남 예산 화암사(華巖寺)에 있는 ‘시경루(詩境樓)’ 현액이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55세에 쓴 것으로 화암사 중건에 맞춰 보낸 글씨다. 그런데 정작 화암사에는 시경루 진묵이 없다.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목판에 각자한 현판만이 소장돼 있다. 화암사를 찾는 학도들이나 국내 서예가들은 아름다운 시경루 진적(손수 쓴 글씨)을 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서울 세운미술관(대표 정세운) 측이 진적 ‘시경루’ 유묵을 공개했다.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은 논문(한국역사유적연구원 2022.5 제9집 논문)을 통해 이 예서가 진본임을 고증했다. 다음 글은 이 고문의 논문을 요약한 글이다. ( 편집자주)

최고의 예서… 현판용이라 가필

난해한 전서(篆書) 두인(頭印)

추사가 거꾸로 찍어 놓은 것

추사 시경루 진적(서울 세운미술관 공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대측정 결과 1720~1810년으로 나왔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추사 시경루 진적(서울 세운미술관 공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대측정 결과 1720~1810년으로 나왔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예산 수덕사 성보박물관 소장 '시경루' 현판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예산 수덕사 성보박물관 소장 '시경루' 현판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한지에 쓴 추사 시경루 진묵
세운미술관이 공개한 추사 시경루 현액 진묵은 한지에 쓴 것으로 200년 세월 흔적이 역력하다. 왼쪽 끝에는 추사의 낙관이 두 개 찍혀있으며 색깔은 홍색이 선명하다. 맨 오른쪽에는 세로로 된 전서(篆書) 두인(頭印)이 찍혀있는데 처음에는 확인하지 못해 난감했다.

추사가 두인을 거꾸로 찍어 놓은 것이다. 추사는 두인을 거꾸로 각자한 예도 있으며 시제(詩題) 반서(反書)로 쓰기도 했다. 오른쪽 두인 전서는 화암사와 병풍바위 ‘시경(詩境)’ 각자(刻字)에 걸맞은 ‘낙화수면개문장(落華水面皆文章)’이다. 뜻은 ‘꽃이 물 위에 떨어지니 모든 것이 시로다.’였다. 이 시구는 송나라 말기 시인 옹삼(翁森)의 사계에 나오는 ‘사시독서락(四时读书乐)’이라는 시(詩) 가운데 봄(春)의 한 구절이다.

<春>
山光照槛水绕廊,舞雩归咏春风香(산광조함수요낭,무우귀영춘풍향)
好鸟枝头亦朋友,落花水面皆文章(호조지두역붕우,낙화수면개문장)
蹉跎莫遣韶光老,人生惟有读书好(차타막견소광노,인생유유독서호)
读书之乐乐何如,绿满窗前草不除(독서지악악하여,녹만창전초부제)

추사는 이 글씨를 쓰면서 고향 화암사의 꽃비 내리는 풍경을 그리워했다. 화암사 현액의 오른쪽 전서로 된 두인은 직접 각자(刻字)한 멋진 시구다. 제주에 있는 죄인임을 스스로 자괴해 풍류를 숨긴 것일까. 추사는 일반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인장을 거꾸로 찍어 보냈다.

추사 예서 '시경루'의 두인. 거꾸로 찍어 놓았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추사 예서 '시경루'의 두인. 거꾸로 찍어 놓았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화암사 추사댁의 원찰
화암사(華巖寺)는 추사 가문의 원찰(願刹)이었다. 추사의 증조부인 영조의 사위 월성위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중건한 절이다. 임금이 사위에게 내린 별사전 안에 있던 절이기 때문에 추사 가문은 이 절을 원찰(願刹)로 삼았다. 유학자로서 불교에 남달리 천착했던 추사에게 영향을 준 사찰이 바로 화암사다.

어린 시절 예산에서 자란 추사는 부모를 따라 화암사를 자주 출입하면서 자연적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추사 원찰 예산 화암사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추사 원찰 예산 화암사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화암사 뒤편에는 흡사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가 있다. 암벽 중간에 각자한 ‘시경’(詩境),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천축고선생댁’은 ‘천축 옛 선생의 집’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옛 선생’이란 곧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이 각자 가운데 시경은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의 예서라고 하며 ‘천축고선생댁’은 추사의 친필로 알려진다.

‘시경’을 새긴 것은 어떤 인연일까.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의 연행 사절을 따라 연경에 갔다가 78세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을 만난다. 일설에는 그에게서 받은 것이 남송 시인 육유의 ‘시경’의 탁본이었다고 한다. ‘시경’ 각자(刻字)나 ‘시경루’ 편액은 모두 스승으로 삼은 옹방강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추사 김정희 영정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추사 김정희 영정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예서는 서법의 조가((祖家)’
‘예서를 서법의 조가(祖家)’라고 정의한 추사는 방경과 고졸함을 으뜸으로 서한(西漢) 예를 바탕으로 고아한 필묵 속에 ‘문자향서권기’를 강조하였다. ‘추사집’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 고상한 뜻이 나타나 있다.

‘완당선생집(阮堂先生集)’ 권7 잡저(雜著) 서시우아(書示佑兒)의 글에 ‘예법은 가슴에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뜻이 있지 않다면 고아한 뜻을 나타낼 수 없다. 또한 흉중에 문자향 서권기가 있지 않으면 팔목 아래 손가락 끝에 드러날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隷法 非有胸中淸高雅之意 無以出手 胸中淸高高雅之意 又非有胸中文字香 書卷氣不能現發於脘指頭).

추사의 이런 예서에 관한 집착과 천착은 젊은 시절 부친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 원로 석학인 옹방강을 만나고부터 깊은 감동과 영향을 받은 것이다. 추사는 남송과 청나라 명필들의 예서 필첩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 예서에만 국한됐던 조선 예서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된다. 방씨 노인에게 보낸 서찰에 추사의 심경이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예서에서 평생 마음으로 베끼고 손으로 따르는 것은 서한과 동한의 옛 필법에 있지만 급기야 이루어낸 것은 경우 당나라의 좁은 틀에 그치고 맙니다. 우리가 한예를 배우지만 모두 당예를 쓰고 맙니다. 그런데 당예 역시 미치기 어려운데 당예라고 당태종(唐太宗)의 효경(孝經) 하나에 그치고 마는 게 아닙니다. 한비(漢碑)에 없는 글자는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추사는 이렇듯 젊은 시절 팔분(八分)을 배우다가 점차 고예를 수학한 것이다. 추사가 팔분을 배운 것을 말해주는 묵적이 충남 예산 고택이 소장한 ‘순우장하승비임본(淳于長下承碑臨本)’이다. 동한 170년에 하승비를 임서한 이 작품은 추사가 썼다는 기록은 없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대측정 결과 1720~1810년으로 나왔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대측정 결과 1720~1810년으로 나왔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4.05.

왜 시경을 새긴 것일까
추사 고택에 있는 상량문은 최근 예산군이 민간에 소장돼 있는 유묵을 발굴 매입한 것이다. 정연한 해서로 쓴 이 진묵은 추사 일문과 원찰 화암사 중수에 대한 기록이라 매우 중요하다.

유홍준 교수는 책에 회갑을 맞은 추사가 61세에 화암사 중수와 더불어 상량문을 썼다고 기록했으나 이 상량문을 비교하면 시대 차이가 있다. 이보다 6년 전인 55세에 써 보낸 것이다. 추사의 귀양은 1840년부터이니 상량문을 쓴 시기는 그다음 해가 된다.

추사는 이때 두 점의 다른 글씨도 써 보냈다. 하나는 현액 시경루(詩境樓)이고 다른 한 점은 무량수각(無量壽閣)이었다. 유홍준은 이 두 글씨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이 두 현판 글씨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쓴 것이 확실한 작품으로 추사체 변천 과정 연구에 기준작이 된다. 특히 이때 쓴 무량수각 현판은 귀양 오는 길에 해남 대둔사에서 초의에게 써준 현판과 같은 글자여서 둘을 비교하면 귀양 전후 추사 글씨 변화를 명확히 살필 수 있다.

‘詩(시)’자는 한나라 고 예서에서 따온 것이다. 임유웅비(臨劉熊碑)에 나오는 고풍을 닮고 있다. 신재범은 ‘추사예서의 조형미연구’에서 “전체적으로 횡액을 수평으로 처리했으며 기필은 방필과 첨필을 혼용했는데 言(언)을 寺(사)보다 크게 해 주획으로 삼은 듯하다”고 평했다.

‘境(경)’자는 추사가 존경해온 청나라 명필이자 전서의 대가인 등석여(鄧石如)의 예서(四體書冊之隷書冊)를 닮고 있다. 좌변의 ‘土(토)’ 자를 작게 쓴 것은 한나라 찬룡안비(爨龙颜碑), 등석여(鄧石如)의 글씨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재범은 ‘境’자는 좌우 대소를 명확히 해 토의 하부 공간을 성기게 하고 우측 경을 빽빽하게 해 소밀 대비를 형성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 같은 형태로 구성한 것은 추사의 만년 작으로 알려진 죽로지실(竹爐止室)의 ‘爐(노)’자와 차호호공(且呼好共)의 ‘好(호)’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누(樓)’자도 왼쪽의 나무 ‘木(목)’을 작게 표현했다. 전체의 획은 왕희지 글씨나 용장사비(龍藏寺碑)를 닮고 있으나 안정감을 주고 있다. ‘境’자를 약간 작게 썼으면서 ‘樓’자에 이르러서는 누각의 중후함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시의(詩意)를 담아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살린 것이다.

추사는 200년 전 이미 조선의 한류로 ‘동해를 차고 오른 한 마리의 용(蒼海登龍)’이었다. 추사의 청국 여행이 자유스러웠고 더 많은 학자들과 교류했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세계 역사에 남을 학문적 업적을 거양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러나 선생의 날개를 꺾은 것은 불의와 부정으로 공고해진 봉건 조선의 세도정치 기득권력이었다. 10년을 적소에서 의기를 활짝 펴지 못하고 수학해 법고창신하며 그나마 추사의 예술세계를 이루었다.

추사의 귀중한 예서 진적인 ‘시경루’ 현액을 찾고 그 안에 얽힌 사연을 파악한 것은 뒤늦게 서학(書學)에 눈을 뜬 필자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이 글씨에 대한 학계와 문화재 당국의 관심을 촉구한다.

한편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은 시경루 종이에 대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대측정 결과 1720~1810년으로 나왔다고 자료를 첨부했다.

정리: 백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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