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도덕주의에 치중했던 조선시대에도 부녀자를 납치, 위해를 가하는 사건이 많았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이란 책을 보면 충격적이다. 16가지 희대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모두 연약한 여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세종 9년 여름에 여인이 죽은 채로 발견됐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에다 몸의 중요 부분이 예리한 칼로 도려내져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었으며 화상을 입은 듯 처참했다. 임금은 이 사건을 듣고 분노해 어명을 내려 범인을 잡으라고 했다. 세종이 이 사건의 수사를 지휘한 셈이다. 의금부사의 도사들과 어사들이 총출동해 범인을 잡는 데 주력했으며 범인이 당대 최고의 학자로 정평을 받는 권모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그는 한때 세종 세자시절의 스승이기도 했다.

범인은 평상시에는 점잖은 얼굴빛을 띠고 도덕군자처럼 살았지만 일종의 사이코 패스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범인은 온갖 술수로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발뺌 했지만 의금부에서 풀려나자 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늘이 범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것인가.

선조 때 5명의 기녀를 살해한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수십명의 상인과 부녀자를 죽인 해적 김수은, 양반 권모는 4명의 여인을 성 고문해 살해한 것이 탄로나 유교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허모에게는 서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질렀으며 심지어 양반가 부녀자를 납치 능욕했다.

사건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해가 저물어 붉은빛을 띠고 있을 무렵 안장도 얹지 않은 말 한 필을 몰고 웬 사내가 양반가에 나타나 마님을 찾았다. 사내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말을 전하고 빨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님이 그 말을 듣고 놀라 황급히 말에 올라탔다. 사내는 여종이 따라갈 틈도 주지 않고 도주했다. 그 뒤 마님은 닷새가 지난 후 대문 앞에 몸을 이불로 가린 채 내팽개쳐져 있었다고 한다.

지난달 29일 강남구 역삼동 한 아파트 앞에서 40대 여성이 남성 2명에게 납치돼 살해되는 살인극이 발생했다. 인근 폐쇄회로(CC) TV에 찍힌 영상과 목격자들의 신고로 범인들을 일찍 잡았지만 시민들의 불안한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이번 사건은 가상자산을 노린 범죄로 청부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법률사무소 직원이라는 경찰 발표에 더욱 아연해진다. 도대체 우리 사회 믿을 곳이 어디인가라는 탄식이 나온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범행 2~3개월 전부터 수십억대 코인을 가지고 있는 40대 여성피해자를 미행하고 범행도구를 준비해왔다고 한다. 피해자를 납치, 여러 경로에서 차를 버리고 렌터카를 타는 등 치밀하게 도주했으나 범인들이 통과하는 곳마다 설치돼 있는 폐쇄회로 TV가 이들의 완전범죄를 용납하지 않았다.

납치를 청탁한 주범은 최고 학부까지 나와 법률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시적인 돈의 유혹에 빠져 결국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

신임 국가수사본부장이 취임한 첫날 이 사건이 발생했다. 우종수 본부장은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한층 고도화된 범죄 척결 체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면서 “국민의 관점에서 경제범죄 수사의 패러다임을 회복하고 첨단 과학 수사역량도 함께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여성들의 납치, 감금, 위해 사건은 매년 발생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돈을 노린 사건도 꼬리를 문다. 문제는 이 같은 범죄가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인식의 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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