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회 신문의 날 기념] 사진으로 보는 해방前 언론 역사… ‘신문은 약자의 반려’ 초심 어디에
[제59회 신문의 날 기념] 사진으로 보는 해방前 언론 역사… ‘신문은 약자의 반려’ 초심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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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신문 창간호 메인면이다. 세간에 이미 공개된 창간호는 글자가 희미한 데 반해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할 정도로 선명하게 나왔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독립신문 정신 계승 위해 제정

매년 4월 7일이면 표어 발표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제59회 신문의 날을 맞아 본지가 6장의 귀중한 사진을 공개한다.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던 이승만 前 대통령(당시 29세)이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아 밀사로 파견돼 미국에서 찍은 사진을 비롯해 독립신문 창간호, 경성일보 전경, 시사신문사, 조선경제신문사 등의 사진이다.

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신문의 사명과 책임을 자각하고 자유와 품위 등을 강조하기 위해 언론인들이 1957년 독립신문의 창간 61주년(1896년 4월 7일 창간)을 기념하면서 제정한 날이다.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에 맞춰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창립됐으며, 협회는 기념식 거행과 함께 신문윤리강령을 선포했다.

신문의 날을 독립신문 창간일로 한 것은 구한말 자주·독립·민권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순한글판 민간중립지로 출발한 ‘독립신문’의 창간정신을 기리고, 그 구국이념을 본받아 민주·자유언론의 실천의지를 새롭게 다짐하기 위함이었다.

언론계는 매년 표어를 제정해 이를 행동지표로서 실천을 다짐하는데, 올해는 공모 결과 ‘정보가 넘칠수록 신문은 더욱 돋보입니다’로 선정됐다. 제1회 표어는 ‘신문은 약자의 반려’였다.

58년이 흘러 바야흐로 이때, 과연 언론사들이 약자의 반려가 되고 있는지, 또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편파·왜곡 보도에 앞장서고 있는 건 아닌지, 독립신문의 창간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한 신문의 날을 맞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부정부패 관료사회 고발한 ‘독립신문’ 4년간의 짧은 역사 속으로
독립신문, 구한말 민중의 계몽지
정부 공작으로 1899년 12월 폐간


위 사진은 독립신문 창간호 메인면이다. 세간에 이미 공개된 창간호는 글자가 희미한 데 반해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할 정도로 선명하게 나왔다. 독립신문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했다.

가로 22㎝, 세로 33㎝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발행했다.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해 두 가지 신문을 발행했다. 이 신문은 여러 가지로 한국 신문사상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정부에서 발간한 데다 한문으로만 기사를 썼던 데 비해 독립신문은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한글신문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또 독립신문은 신문의 중요성을 일반에 널리 인식시켜 그 후에 여러 민간 신문이 창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독립신문은 민중 계몽을 위해 국민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나라의 독립이었으며, 이를 위해 애국심과 충성심을 권했고, 교육의 중요성, 민주주의의 필요성 등을 가르쳤다. 아울러 관료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규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정당보도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대립해 결국 탄압까지 받아야 했다. 정부는 신문사를 인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작을 시도한 결과 1899년 12월 인수에 성공한 뒤 12월 4일자로 종간호를 내 영구 폐간시켜버렸다.

대한매일신보, 日에 맞선 민족지로
강제병합 후 일제 기관지로 인수


독립신문이 폐간된 뒤 최고의 민족지 역할은 런던 데일리 뉴스 특파원이었던 베델(한국명: 배설) 영국인 기자가 발행한 대한매일신보가 하게 된다. 베델은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국한문, 순한글, 영어신문(코리아 데일리뉴스) 3개의 신문을 발행하는데 한 신문사에서 3개의 신문을 동시에 발행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 일제의 탄압과 맞선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5월 베델이 죽은 뒤 힘을 잃어 1910년 일제에게 넘어가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총독부 기관지가 되는 안타까움을 겪게 된다.

▲ 1910년대 모습. 현재 서울시청 자리에 있는 경성일보를 볼 수 있고, 도로 멀리 광화문이 보인다. 왼쪽 담장안쪽으로는 덕수궁 대한문이 있다. 이곳은 1919년 고종황제 장례식 때 최대 군중들이 운집했던 광장이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 기관지로서 가장 큰 영향력 행사한 ‘경성일보’

이후 일제는 더욱 언론을 장악하게 되는데, 기관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문 중 하나가 경성일보(京城日報)였다. 대한제국 시절 일본인이 발간하던 ‘한성신보(漢城新報)’와 ‘대동신보(大東新報)’를 합병시켜 1906년 9월 1일에 창간된 것이 경성일보였으며, 창간 당시는 국한문판과 일문판으로 발행했으나 1907년 4월 21일부터 일문판만 발행했다. 일제는 1910년 매일신보를 경성일보의 자매지로 발행했다.

1914년 현재의 서울시청 자리에 사옥을 옮긴 뒤 1923년에는 시청 자리에 있던 사옥을 경성부청(京城府廳) 신축부지로 양도하고 그 옆자리(현재 서울신문사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사옥(별관)을 신축해 1924년에 옮겼다. 1930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영자신문 ‘서울프레스 The Seoul Press’를 병합함으로써 경성일보는 일어, 한국어(매일신보), 영어(서울프레스) 3개 국어로 된 신문을 발행하게 된다. 8.15광복 후 그해 10월 31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위 사진은 현재 서울시청 자리에 있는 경성일보를 볼 수 있고, 도로 멀리 광화문이 보인다. 왼쪽 담장은 덕수궁 대한문이 있는 자리다. 이곳은 1919년 고종황제 장례식 때 최대 군중들이 운집했던 광장이다. 아래 사진은 현재 서울신문사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경성일보 별관이 신축돼 있고, 멀리 광화문 뒤로 총독부 건물이 보인다. 같은 위치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당시 태평로 거리는 지금 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전경이다.

▲ 1920년대 모습. 현재 서울신문사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 경성일보 별관이 신축돼 있고, 멀리 광화문 뒤로 총독부 건물이 보인다. 당시 태평로 거리는 지금 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전경이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1910년 창간, 친일 성향의 일간신문 ‘시사신문사’
1921년 민원식 암살 후 폐간

▲ 경성부 장곡천 98번지 소재 시사신문사 앞에서 관계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친일파 성향의 일간신문인 ‘시사신문’은 두 번에 걸쳐 발행된다. 첫 번째 시사신문은 1910년 1월 1일에 사장 민원식, 발행인 백낙균으로 창간됐으며, 친일적 제작태도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민원식은 1920년에 두 번째 시사신문을 창간한다. 3.1운동 뒤에 총독부가 한국인에게 3개의 민간지를 허용해주겠다는 방침을 정하자 민원식은 자신이 주재하던 협성구락부(協成俱樂部)를 국민협회로 개칭해 그 기관지로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4월 1일 동아일보와 같은 날 또 하나의 시사신문을 창간한다. 민원식이 1921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항일투사 양근환에게 암살당한 뒤 시사신문은 자연스럽게 폐간됐다. 이후 시사신문은 일간지 대신 월간지 ‘시사평론’으로 발행하게 된다.

위 사진은 경성부 장곡천 98번지 소재 시사신문사 앞에서 관계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우측에 일본인 복장을 한 이들이 있어 친일신문사임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가 함께 이 건물에 이전했다. 아래 사진은 경성부 황금정 이정목 소재 조선경제신문사 앞에서 일장기를 걸고 인쇄부 직원들이 기념 촬영하는 모습이다. 일장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친일성향의 신문사임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경제신문사는 신문 설립부터 석간 일간지로 발행했다.

▲ 경성부 황금정 이정목 소재 조선경제신문사 앞에서 일장기를 걸고 인쇄부 직원들이 기념 촬영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한편 일제시대 이 같은 친일 논조의 언론 속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초창기에 반일 성향의 논조로 대항했다. 조선일보는 1920년대에만 4차례나 정간됐고, 동아일보는 1940년에 강제 폐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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