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추석은 보통 멀리 조개구름이 듬성듬성 끼는 높고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우리를 찾는다. 여름 무더위가 선선하게 식어가는 참 좋은 때다. 그 무렵 너른 평화 지대 들판에서는 곡식들이 누렇게 익어간다. 보기만 해도 풍성하고 배가 부르다. 대(大)명절 추석은 그 곡식들이 내품는 진한 향기를 흠뻑 머금고서 우리에게 다가선다. 이 날만은 굴뚝에서 펑펑 솟아오르는 연기만큼이나 부러운 돈을 만들어내는 공장 지대의 활력도 그리 부러운 것은 아니다. 농촌에서도 도시에서도 산골 오지에서도 추석은 그저 우리 모두를 공평하게 축제의 분위기에 푹 잠기게 할 뿐이다.

밤에는 둥근 달이 환하게 뜬다. 그 둥근 중추(中秋)의 달이 품안으로 굴러들어오려 할 때는 뭔가의 기원(祈願)이 저절로 중얼거려질 수도 있다. 만약 두둥실 뜬 그 밝은 달을 혼자 보기가 아깝거든 여럿이 모여 햇곡으로 빚은 음식을 먹고 마시며 신나게 흥을 내어 한바탕 강강술래의 즉흥 마당극을 펼친들 전혀 흠 될 것이 없다. 그 장소가 고향 마을 동산이라면 토끼가 방아 찧는 달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더구나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특별히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가 같이 즐기는 관중으로서 꾸역꾸역 참여하게 될 것이므로 복잡한 일상에서 찌든 심신을 한 번쯤은 시원하게 풀어보는 집단 힐링(Healing)의 축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추석은 이렇게 둥근 달이 뜨는 음력 8월 보름의 환한 밤이 있어 명절 분위기가 더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다. 하긴 밤뿐이 아니다. 주야(晝夜)가 모두 대명절이 되기에 딱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다. 절기(節氣)로 보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더운 여름 고비를 넘기고 시원한 가을로 들어서는 청명한 날씨도 날씨지만,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가꾸느라 땀 흘린 농민들이 풍년 들판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활짝 펼 수 있는 날이 바로 추석이기도 하다. 쌀 한 톨이 땀 한 방울이다. 그토록 땀을 흘린 농민들이 이 날 비로소 보름달 같은 얼굴을 하고서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날을 추석으로 정한 우리 조상의 슬기가 경이롭다. 하지만 2014년 추석은 태양이, 그 거대 항성(恒星)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황도대(黃道帶)의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절기로 보아 좀 빨리 찾아 왔다. 황도대는 엄밀히 말하면 태양이 움직임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태양의 위치가 달라 보임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추석은 보통 서리가 내리는 절기에 찾아오지만 올해는 웬일인지 앞당겨져서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의 날과 일치했다. 38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이에 올 추석은 가을에 맞는 추석이 아니라 여름에 맞는 후덥지근한 추석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햇곡은 미처 수확되기 전이며 추석 분위기를 한껏 띄워야 할 추석 보름달은 만월(滿月)은 만월이로되 청명한 가을밤 특유의 정취를 물씬 머금은 그런 만월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그 추석이 남북한을 통틀어 우리 민족 전체의 대명절로서의 의미를 추호라도 앗아간 것은 없다. 그렇기에 불경기 속에서도 국민들의 지갑이 열려 재래시장은 붐비고 가족 상봉과 성묘를 위한 나들이객들로 전국의 크고 작은 도로들은 몸살을 앓았다. 명절 때마다 겪는 일종의 민족적 열병(熱病)이며 ‘명절 증후군(症候群)’이라 볼 수 있다.

다기능 산업사회는 가족들이 부모 형제 곁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을 주요 특색으로 한다. 그나마 모일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명절만 되면 못 만나서 힘들어 하는 열병이 도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이는 추석은 그 열병의 치료사(Healer)다. 가족이나 좋은 벗들은 떨어져 살게 되면 몹시 서로 그리워하게 된다. 너무 오래 못 만날 때는 남북 이산가족처럼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만나면 가끔은 싸우기도 한다. 진한 가족애의 ‘역설(Paradox)’이다. 만나는 순간은 반갑지만 일단 회포를 풀고 나서는 우애를 다치고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있다. 올 추석에도 그런 일이 이곳저곳에서 더러 벌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투고 형제끼리, 동서끼리 얼굴을 붉히고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을 드러낸 일 등이다. 꼭 큰 일로만 다투는 것은 아니다. 흉허물 없이 가까운 사이임을 믿고 상대에 대해 조심스런 배려나 격식 없이 내뱉은 말이 비록 작은 것일지언정 피차를 잘 이해해줄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오히려 섭섭한 감정이 생기거나 상처 받기가 쉽다. 가족 간의 대화는 사리보다 감성이 앞서기 마련이다. 가깝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그 같은 막역한 화법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가시털복숭이의 동물 호저(豪豬)가 겪는 ‘호저의 딜레마(Porcupine dilemma)’와 같은 것이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조어(造語)이므로 그가 제대로 관찰을 하고서 만든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날카로운 가시털을 뒤집어 쓴 호저는 날씨가 추울 때는 서로 다정하게 접근해 체온을 나눔으로써 몸을 녹인다. 하지만 몸이 녹은 뒤에는 쿡쿡 찔러대어 상처를 내는 가시털이 싫어져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보고 싶어 열병을 앓던 가족 피붙이들이 추석에 만나 다투는 풍경이 마치 호저의 그런 행태와 비슷하다.

지금은 쌍방 소통, 수평적 소통의 시대다. 나이나 서열이 중심이 되는 일방 소통, 일방통행의 시대가 아니다. 이런 시대상에 적응하는 사회가 엄격히 유별(有別)하던 부부관계를 변화시켰듯이 가족 간의 소통 방식, 소통의 화법을 바꾸어놓았다. 그렇다면 추석이 ‘호저의 딜레마’를 뛰어넘어 어디까지나 가족의 화목을 다지고 ‘힐링’의 날로만 되게 하려면 가족 간의 소통 문화도 사회의 물결에 따라야 한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다. 사회 화합과 평화는 가정의 화합과 평화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의 평화를 말할 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나오도록 됐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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