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 이른 아침에 아파트 뒷산에 올라 보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참 많다. 캄캄한 새벽부터 산을 찾아 체조나 각종 운동기구로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단련한다. 이 모습이 바로 건강하고 활기찬 우리 사회의 진면목인 것 같아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60대로 보이는 젊은 노인들이 둘러앉아 체조를 하며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려왔다.

어디 소일거리나 몇 시간 봉사할 일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루종일 놀며 허송세월하느니 동사무소에서 우리를 불러 무슨 일이라도 시켜주면 덜 심심할 테지.” “일하는 즐거움을 느껴본 지도 오래야. 일당은 하루 1만 원만 줘도 좋고 일은 단순노동이라도 좋은데 말이야.”

일자리 얘기였다. 시골에서야 손에 잡히는 게 모두 일이다. 텃밭을 가꾸는 것도, 가축을 키우는 것도 다 일거리이다. 농촌과 달리 도시에서 생활하는 어르신들은 따분한 일상을 호소한다. 노인복지대책 운운하지만 어르신들은 단순히 연금을 지급 받는 것보다는 노인일자리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이렇게 건강한데도 할 일을 못 찾는 노인들이 많고 보면 현재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노인정책이 아직 국민 피부에 썩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체면이고 무어고 다 팽개치고 막일을 하는 이도 있다. 출근 때 골목길에서 만나는 한 할머니는 폐지를 주워 판다. 매일 새벽 4시면 뒷산 정상에 올라 체조를 하면서 생활해 왔는데 얼마 전부터 노동으로 바꿨다고 한다. 할머니 말을 들어보면 먹고 노는 것보다는 생산적인 게 낫다는 생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70대인 이 할머니는 하루에 적게는 5천 원, 많게는 1만 원 정도를 번다. 아침 시간에 온 동네를 이 잡듯 뒤져 번 돈 치고는 적다. 그러나 할머니는 늘 웃는 얼굴이다. 구청 같은 데서 폐지를 사들이면서 좀 더 값을 쳐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왠지 정부 정책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 외국서 살다 돌아온 사람들이 한국이 좋다고 느끼는 것으로 많이 꼽는 것이 활발한 리콜제와 제품AS이다. 구입한 제품에 하자가 있어 AS를 요청했을 때 차이점이 분명하다고 한다. 외국에서는 한국처럼 금세 달려와 주지 않아 답답하고 속상했다는 것이다. AS가 잘 된다는 것은 중요한 마케팅 승부처다. 한국산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이 해외에서 호평을 받아온 이유는 많겠지만 원활한 AS도 큰 인기 요인의 하나다. AS천국 한국에서 AS가 안 되는 것이 있는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스갯소리 같지만 사실은 심각한 얘기다. 즉 한국의 정치인과 공직자에 대한 리콜 문제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19눈물 담화는 그동안 제기된 문제점들을 거의 망라하는 광범위한 내용을 담았다. 해경 해체, 국가안전처 신설, 민관유착고리 단절, 퇴직공무원 취업제한 대상기관 확대, 부정청탁금지법안 국회 통과 추진, 민간전문가 공직 진입 대폭 확대평상시 같으면 모두 엄청난 뉴스들이다. 파격적이고 전향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됐다. 망국적인 안전불감증을 극복하고 부실을 털어내야 한다.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호의 출발을 위해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볼썽사납다.

그런데도 다소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하다. ‘국가대개조라는 말까지 나와 획기적인 수습책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공무원비리에 대해서는 김영란법의 역할에 기대를 걸 만하다. 문제는 공무원의 신분보장철폐가 실현되지 못한 점이다. 순환보직을 거듭하며 복지부동 무사안일에 빠져도 해직되는 일은 없어 철밥통 공무원이란 말이 나왔지 않았는가. 이 난에 언급했던 국민리콜제도 외면됐다. 최근 만난 한 선배언론인은 세월호 사고와 관련, “만약 의원내각제라면 정권이 뒤집어졌을 것이다고 말한다. 5년 단임 대통령제로는 민심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경직성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누더기헌법이라는 말도 있지만 필요하면 헌법 개정이라도 할 각오는 없는 걸까. 공무원, 정치인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대통령까지도 내 손으로 직접 선출하는 동시에 내 손으로 직접 소환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민유방본(民惟邦本)’. 서경에 있는 말이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임을 밝히는 사상이다. 조선초 개국공신 정도전이 말한 민본(民本)’ 사상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어 국민을 위한 정치를 실시하는 제도가 민주주의 아닌가. 국민소환제와 국민투표제가 직접민주주의제의 근간이 아닌가. 대의제라는 간접민주주의로는 의원 혹은 공직자와 유권자 간에 의사의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민심과 어긋나지 않도록 공직자가 국민을 두려워하는 세상이 돼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무원의 신분보장을 철폐하고 국민리콜제를 도입하는 쪽으로 대책을 보완해야 하지 않을까.

시스템에 앞서 공복(公僕)의 의식부터 개선돼야 할 일이다. 하지만 차제에 국가시스템도 전면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개조라는 말에 걸맞다. 대통령, 정치인, ()과 국민 사이의 거리는 좁혀져야 한다. 사이가 멀어지면 국가적으로 불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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